조선역사를 가르치지 마라
왜놈들 순사 세워 감시해도
초량동 하숙집 다락방 깊은 곳에 숨어
민족혼을 심은 그대

상하이 뒷골목
독립군 어린 자식 거두어
한그루 푸른 솔을 심은 뜻은
반만년 역사의 뿌리를 내리려 함이었네

동포의 끔찍한 간도 참상을 듣고
그들을 앞장서 도운 이도 그대요
미국 동포에게 손을 내밀어
함께 투쟁의 길 독려한 이도 그대였으니

아!
조선, 중화 천지에
그대 손길 닿지 않은 곳이 어디며
그대 발길
그대 사랑 머물지 않은 곳이 어디랴!


▲ 1919년 상해대한애국부인회 김순애 회장이 미주여자애국단에게 보낸 편지
● 김순애(金淳愛,1889.5.12-1976.5.17)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귀회의 건강과 행복을 먼저 축하하오며 거리가 가깝지 못함으로 인하여 우리의 정신이 같고 목적이 같은 동지면서 피차 지금까지 서로 통신과 연락이 없었음은 실로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올시다. 그러므로 지금 귀회에 통지하옵고자 하는 바는 상해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원이 60여 명이오, 그간에 몇 가지 진행한 일이 있사오며 앞으로 더욱 원만히 진행할 방침을 연구하여 우리의 죽었던 국가를 다시 살게 하는데 전심을 갈구하며 이에 필요한 것은 서로 필요한 연락이외다. -후략- “신한민보 1919.8.14일 자 상해애국부인회장 김순애 ”

위는 김순애 애국지사가 상해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있을 때 미주지역 여자애국단에게 보낸 편지이다. 초고속 인터넷이나 팩스 등이 없던 시절 서로 연락조차 취하기 어려운 형편 속에서 펼친 나라 사랑 정신이 잘 드러나는 편지글이다.

김순애 애국지사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사이에서 태어났다. 대한애국부인회의 김마리아는 그의 조카이다. 고향에서 송천소학교를 마친 김 애국지사는 1909년 6월 기독교계 학교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진학하여 학업을 마친 뒤 부산의 초량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등 교육운동에 매진하였다. 1910년 나라가 강제 병합되자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몰래 가르치다가 왜경의 감시를 받게 되고 탄압이 가중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의사로 일하고 있던 오빠 김필순(金弼淳)과 함께 1912년에 만주 통화현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중국땅에서도 김 애국지사는 활발한 독립운동을 쉬지 않고 펼쳤는데 상해로 옮긴 뒤에는 상해지역 부녀자들을 규합하여 '대한애국부인회(1919년 6월)'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어 국내외 여성단체의 연계와 부녀자 계몽, 태극기 제작, 보급 등 애국심에 고취에 앞장섰다. 또한, 이듬해 1월에는 한인 동포들의 자치와 친목단체인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의 간부(의원)를 맡아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후원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손정도·김구·윤현진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의 배달과 독립사상 고취,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모집, 독립운동 자금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여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6년 7월에는 안창호·엄항섭·송병조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발족하여 세탁과 바느질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또 1930년 8월에는 김두봉의 처 조봉원 등과 함께 상해지역의 젊은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좌파 여성운동 세력을 견제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정부를 따라 중경(重慶)으로 옮겨가고 여러 계파가 단합하여 통합 한국독립당이 성립하는 등 중국의 항일전쟁에 부응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조직들이 재정비되었는데 이때 중경에 있던 각계 한인 여성 50여명을 임시정부 집무실로 초빙하여 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다.

1943년 5월에 한국의 신탁통치 문제가 중국 신문에 거론되자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등 5개 정당 단체의 대표와 함께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애국부인회 대표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완전 자주독립, 외국의 공동관리나 보호 반대를 천명하였다. 또한, 1945년 3월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검사위원으로 일하며 임시정부의 재정운영을 맡아 일하다가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이래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정신여중·고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956년에는 정신여중·고 재단 이사로 취임하는 등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정부는 김 애국지사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97년 6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 인물로 선정하여 그의 애국정신을 널리 알렸다.


<더보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무대를 주름잡은 남편 김규식 선생

● 김규식(金奎植,1881.2. 28- 1950.12.10)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아호는 우사(尤史). 동래 출신. 1881년 김지성(金智性)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우리나라에 파견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내정간섭을 단행하자, 동래부사의 막료로 있던 그의 아버지 김지성은 일본과의 관계설정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양길에 올라야 했다.

게다가 1887년에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6살에 고아가 되었는데, 마침 우리나라에 와 있던 미국 북장로파의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 G.)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그때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06년에 조순환의 딸 조은수와 결혼하였으나 부인과 사별하고, 1919년에 독립운동 일에 매진하던 김순애와 재혼하였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노크대학교(Roanoke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으며, 이듬해 프린스턴대학원(Prins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와이엠시에이학교(YMCA學校)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19년 3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 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이름으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뽑혔으며, 1921년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회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8·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 그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펴나갔다.

그는 교육가와 학자로서의 활동도 활발했는데 중국 복단대학(偪旦大學)에서의 영문학 강의를 비롯하여 톈진(天津) 북양대학(北洋大學) 등에서 강단생활을 하였으며, 1950년에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그해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삶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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