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6월 고종은 조선의 지정학적 요인이 스위스와 유사한 점을 감안하여 국제적보장아래 조선의 영세중립 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이 조선의 영세중립을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고종의 영세중립 노력은 실패하게 되었다.

1900년 8월 고종은 조병식특사를 통해 일본정계의 중진 고메이 도구마에게 조선의 영세중립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이 조선을 대신하여 열강국가들에게 조선의 영세중립을 제의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거절 당했다.

1900년 10월 고종은 조병식 공사에게 도쿄주재 미국공사 배크에게 미국정부가 조선의 영세중립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구하도록 하명하였다. 이도 거부당했다.

1903년 9월 고종의 밀사로 일본을 방문한 권영운은 고메이를 통해 조선의 영세중립방안을일본정부에 다시 제출했으나 또 다시 거절되었다.

1904년1월20일 조선정부는 일방적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을 선포하고 어떤 나라도 조선에서 전쟁을 하지말 것을 요구했으나 러-일전쟁이 조선에서 발발했다.

1904년 1월22일 워싱턴주재 조신희 공사는 조선의 영세중립선언문을 미국정부에 공식전달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2월10일 발발함으로써 조선은 미국,일본,러시아, 중국등 어느나라로부터도 영세중립정책을 지원받지 못했다.

1927년 2월15일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이 조선 일보 핵심간부였던 신석우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좌파와 우파가 분리 대립해선는 안된다며 분산에서 통일”을 되뇌이며 신간회를 조직 중립적 좌우합작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탈퇴로 조직은 무너지고 말았다.

1927년5월27일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주도로 신간회의 취지에 따라 별도 여성들만이 참여하는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로 중립을 표방하고 근우회를 발족시켰다. 이 또한 신간회가 무너지면서 화요회-북풍회 ML당등 좌익계열의 남자단체에 연결되어 1930년 신간회의 뒤를 이어 해소되었다.

1946년 7월10일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했다. 1947년 10월20일 좌우합작운동참여자들이 “좌우합작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우선 중간진영을 단결시킨다”는 명분으로 “민족자주연맹”을 구성 김규식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1947년 2월15일 좌우합작위원회는 끝내 해체를 선언하게 되고 1년 7개월간의 좌우합작운동에 종지부를 찍고 김규식을 주석으로 한 민조자주연뱅도 자연해체되고 중립진영의 역할도 무산되었다.

1948년 김구와 김규식은 2월16일자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남북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평양으로 남조선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 조선 정당시민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는 남한에게 발언기회도 주지 않고 남북한 공산당이 미리 만들어 놓은 각본에 따라 일방적으로 그리고 모욕적으로 진행하고 끝났다. 5월5일 서울에 도착한 두 김씨는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로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 두 김씨는 일체 침묵을 지켰다.

1948년5월12일 김용중이 최초로 “한반도 중립화로 한국문제 해결의 기초로 삼자”라고 유엔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냈다. 1961년 2월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는 명예의 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그뒤 박정희와 김일성 그리고 유엔에 미국체류 중 서한을 보내 “중립주의통일”을 주장했다.

1988년 12월 김상규는 “무등일보”에 “2개의 세력권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는 길은 곧 중립화의 조국을 어떻게 실현하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1988년 10월 권두영은 “민주통일”지에 “새로운 민족주채세쳑이 형성되었을 때 한반도의 중립화가 실현될 뿐 아니라 중립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고 기고하였다.

1997년 김문갑은 그의 저서 “코리아의 영세중립과 민족통일”에서 “스위스식 영세중립화 통일방법”을 제창하였다.

조선왕조말 고종으로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중립주의추구는 일제하 독립운동가를 위시해 해방 후 좌우합작, 남북협상파 그리고 중립주의 추구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무려 120여년 지났음에도 우리는 중립화통일에 대한 정책에 비우호적이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뿌리박힌 유교 즉 주자학정신에 있다고 본다. 주자학의 순수성추구는 사소한 악도 이를 미워하고 시비선악의 규명이 매우 엄격하여 정통성이 아닌 남의 의견을 준엄하게 가리어 통합의 기가 없는 것이다. 당쟁의 전통도 이를 말한다. 더욱이 우리세대는 종북세력들이 자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중립중간파”에 편승하여 보수와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국민들은 중립주의에 비우호적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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