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각, 버스마저도 날선 새벽 추위를 느끼는 듯 두꺼운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기사 휴게실 문을 여니 난로 주위엔 기사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몸을 녹이며 운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난데없는 불청객(?)의 등장에 잠시 눈이 쏠렸을 뿐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시간은 5시를 넘어 운행시간이 가까워지자 밖으로 나가 오늘 타고 나갈 82번 버스를 찾아 나섰다. 다른 버스들은 출발 준비를 위해 몸을 데우고 있었지만 82번 버스는 아직 잠을 자고 있는 늦잠꾸러기처럼 잠잠하기만 했다.

버스 주위에서 한 기사분께 82번 기사님이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분은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었고, 찾아온 취지를 설명하니 그제서야 그분은 자기가 82번 첫차를 몰고 나간다고 답했다.

운행준비를 마치신 이관덕씨(48, 남)는 히터도 잘 안되는 차라고 멋쩍게 기자를 걱정한다. 5시 20분 드디어 차가 출발했다.

“예전엔 황금노선였죠”
시내버스를 운행한지 2년 정도 됐다는 이관덕씨는 3년전 S사의 통근버스를 몰았다고 했다. 그러나 구조조정 때문에 그만두고 1년 남짓 관광회사에서 일했다고 했다.

오래 전만 해도 82번 노선은 그야말로 승객들이 가득 찬 ‘황금노선’였단다. 수입이 제일 좋은 노선이다보니 좋은 차도 우선적으로 배당됐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노선의 승객이 많이 줄어 상황이 역전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씨는 운행내내 눈만 남기고 얼굴을 두꺼운 마스크로 덮었다.

“경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주 5일제 시행 이후로 주말만 되면 놀러가는 사람들로 넘치고…”

이씨는 하루 16시간 정도 일한다고 했다. 4시쯤 집을 나서 운행을 시작하고 하루 일을 마무리하면 거의 자정을 넘긴다고 했다.

“하루종일 앉아서 운전만 한다고 편해보이겠지만, 사실 허리나 하체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이에요”

처음엔 버스 운전에 적응하느라 무척 힘들었단다. 교통 체증이 있을 땐 한 번 돌고 오는데 3,4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운전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이 일을 위해선 틈틈이 운동을 따로 해서 체력을 비축해놔야 버스 운전을 할 수 있다고 귀뜸한다.

“히터가 잘 안 되는데다 먼지를 자주 마셔 감기가 떨어질 틈이 없어요.”

그래서 이씨도 쉬는 날이면 광교산 등 등산으로 체력을 다진다고 말했다. 쉴 때 집에 있으면 잡념만 들고 오히려 산에 올라 재충전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게 이씨의 건강유지 방법이다.

   
▲ 첫 버스를 운행중인 이관덕씨

“기름값 아끼려고 버스를 이용해요”

휴일이고 첫 차가 다니는 이른 시간이라 승객은 좀처럼 없었다. 혹시 이러다 단 둘이서만 돌다 끝나는 게 아닌가 약간의 조바심마저 들었다. 그 때 버스가 멈추며 출입문이 열렸다.

첫 버스에 으례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탈 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첫 승객인 젊은 여성은 평택의 개인병원 간호사(27, 여)로 일한다며 기차로 갈아 타기위해 버스를 이용한다고 했다.

“(새해 첫날 출근하지만) 늘 하는 일이라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버스에서 내려 서둘러 역으로 뛰어가던 그녀의 모습에서 나른함이나 피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새 반환점을 돌아 차고지로 향하는 길목 팔달문 부근에서 두 명의 승객이 함께 탔다.

빌딩주라고 소개한 박구철(63, 남)씨는 건물에 물이 새서 매일 이 시간에 나왔다 귀가한다고 설명했다.

야식식당을 운영한다는 김미애(42, 여)씨는 매일 5시에서 6시 사이에 영업을 마친다고 했다.

“원래 자가용이 있는데 기름값때문에 버스로 다니고 있어요.”

여기서 ‘요즘 어떠시냐 ’는 다소 식상한 질문을 했더니 예상과 빗나지 않았다. 게다가 정보통신기기 영업을 한다는 바깥분도 경기가 어려운데다 경쟁이 심해서 요즘 부쩍 힘들다며 한숨이 다소 배인 말투로 얘기했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종점이 다가온다. 김씨가 내리고 마지막으로 버스를 이용한 김종욱씨(27, 남)는 소방시스템 점검일과 모임 참석으로 이제 귀가한다고 피곤한 기색으로 얘기했다.

“연말연시인데다 겨울철이고 해서 밤새며 일할 때가 많죠.”

부천에서 온지 3년째라는 김씨와 종점에서 함께 내리며 그는 밝고 넉넉한 미소로 기자에게 새해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승객들 수준도 바뀌어야 해요”

6시 20분에 차고지로 돌아온 이관덕씨는 기자를 구내식당으로 안내했다. 식사후 이씨는 기사분들이 다 인상이 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버스 회사나 기사들도 친절도나 서비스를 높이려고 하는데 승객들은 아직 제자리 인것 같다”며 “교통체증이나 도로 사정때문에 조금만 늦어도 불만을 털어놓는 분은 보통이죠. 본인은 움직이지 않고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 차를 세우지 않으면 타지도 않는 승객도 있어요. 그러고 나중에 탑승거부했다고 항의하기도 하고요.”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돌고 와서 다음 운행을 앞두고 휴식시간이 넉넉하다고 했다. 이씨는 추운 날이 고생이 많다며 오히려 기자를 걱정해 줬다.

내년에 또 버스에서 뵐 지 모르겠다는 썰렁한 농을 하는 기자를 따뜻한 인사로 보내는 이관덕씨의 말을 떠올리며 짧았던 동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거 같애요. 무슨 일이든 다 힘들고 그렇더라구요. 다들 열심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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