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전원도시 레치워스 시가지 전경. 1903년 런던 북쪽 60km 지점에 건설한 영국 최초의 전원도시 모습이다. (사진=구굴지도)
영국의 전원도시 레치워스 시가지 전경. 1903년 런던 북쪽 60km 지점에 건설한 영국 최초의 전원도시 모습이다. (사진=구굴지도)

전원도시(Garden City)의 등장은 1898년 영국의 도시계획가 에버네저 하워드의 학설에서 시작됐다.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도시로 집중되자 생활환경이 악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결책으로 도시적인 것과 전원적인 것을 융합한 도시만이 이상적인 삶을 영위케 한다고 생각했다.

가든 시티는 정원이 많은 도시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전원 속에 건설된 도시이며, 자급자족 도시를 목표로 하는 중요한 특징을 갖는다. 

전원도시는 규모가 커지면 도시민의 건강도 공동체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워드는 전원도시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도시 인구를 3만의 자급자족 도시를 제시했다. 

둘째 토지는 도시경영 주체가 소유하고, 개인은 임대사용을 원칙으로 하고, 토지공개념 제도를 주장했다.

셋째 도시의 물리적 확장을 억제하고, 식량의 자급자족, 오픈스페이스 확보 등을 위해 도시 주변부에 넓은 농업지대의 보유와 도시 내 충분한 공간확보를 주장했다. 

넷째 시민경제 유지 즉 경제적 자족성을 위한 산업을 유치해야 한다고 했다. 

다섯째 상하수도, 전기, 철도 등을 도시 자체가 해결하고, 도시의 성장과 개발에 따른 이익은 조세감면이나 도시개선을 위해 재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여섯째 시민의 자유와 협동의 권리 향유 등을 제시했다. 

레치워스 지도. 방사형의 도시 모습이다. 중심지에 광장과 공용의 청사, 성당, 공원이 있고 중간지대에 주택과 학교, 외곽에 공장과 창고, 농경지, 철도가 위치하고 있다. (자료=구글지도)
레치워스 지도. 방사형의 도시 모습이다. 중심지에 광장과 공용의 청사, 성당, 공원이 있고 중간지대에 주택과 학교, 외곽에 공장과 창고, 농경지, 철도가 위치하고 있다. (자료=구글지도)

이에 따라 전원도시의 규모는 약 400ha(120만평), 인구는 약 3만2000명 규모, 시가지는 방사형이며, 중심부에 광장과 공용의 청사 등 공공시설이 있고, 중간지대에 주택과 학교, 외곽지대에 공장과 창고, 철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가지 밖으로는 대농장, 목초지 등 약 2000ha(600만평)의 농업지대가 펼쳐져 인근 도시와 공간적 분리를 유도하고, 도시간 연결은 철도와 도로를 확보하는 이론을 제시했다. 

영국의 최초 전원도시는 1903년 런던에서 약 60km 북동쪽 외곽에 위치한 레치워스(Letchworth)다. 레치워스는 1550ha(465만평)의 대저택을 사들여 도심외곽에 그린벨트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환경보존을 위해 기존에 있던 수목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을 설계했다. 

화성전도. 한글본 뎡리의궤에 수록돼 있다. (사진=수원시)
화성전도. 한글본 뎡리의궤에 수록돼 있다. (사진=수원시)

수원의 신도시 화성은 영국의 경우와는 최초의 출발동기가 다르기는 하나 자족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목표와 접근방식은 비슷함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반계 유형원(1622~1673)은 1670년에 집필한 반계수록에서 “수원부 북쪽 들 가운데 임천의 지세를 보고 생각하건데, 지금의 읍치도 좋기는 하나 북쪽의 들은 산이 크게 굽고 땅이 태평해 농경지가 깊고 넓으며 규모가 크고 멀어서 성을 읍치로 하게 되면 참으로 대번진이 될 수 있다. 그 땅 내외가 가히 1만호는 수용할 것이다” 라고 수원부 신읍의 입지를 내다봤다.

유형원의 주장은 1789년 사도세자의 묘 이장이 결정되면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묘 이장지가 수원부의 읍소재지 뒷산에 위치해 구읍을 이전해야 했는데 이미 유형원이 119년 전에 구읍의 이전지를 지목했기에 신읍건설이 가능했다. 

1789년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조성한 후 화성축성은 4년이 지난 1794년 정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 10일 완공됐다. 정조와 총리대신 채제공은 신읍의 번영책을 다방면으로 구상하게 된다.  

영국의 전원도시와 수원화성 신도시 비교. (자료=김충영 필자)
영국의 전원도시와 수원화성 신도시 비교. (자료=김충영 필자)

정조는 신도시 화성을 도성을 방어하면서 상업과 농업이 번성한 자족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주민과 상인 유치를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신읍이 조성된 이후인 정조 14년(1790) 2월 좌의정 채제공의 발의로 신읍에 부자들과 백성을 모아들이는 방안을 논의했다. 

먼저 도회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서울의 부자 30여 호에게 무이자로 1000냥씩 빌려주어 이들이 수원에서 시전을 짓고 장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수원과 그 부근에 5일장을 설치해 장시를 상설화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사방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면 읍치의 면모가 바뀌게 될 것임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수원부사 조심태는 구체적인 상업 진흥책을 제시했다. 전국에서 부호를 모아 시전을 설치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므로 수원지역 사람들 중 여유 있고 장사를 잘 아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자본금을 빌려주어 이익을 얻어 살게 함이 상책이라고 주장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중앙정부에서 6만5000냥을 3년을 기한으로 지원해줬다. 이런 노력으로 상업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자 수원은 자급자족의 경제 활동이 가능한 상업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신읍조성 후 3년이 경과된 1792년에 편찬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화성행궁의 정문인 진남루(신풍루)앞 대로 좌우에 여덟 종류의 시전이 들어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도로북쪽에는 입색전(비단파는 가게)과 어물전, 도로남쪽에는 목포전(모시, 무명, 목화를 파는 가게), 상전(소금과 일용잡화 가게), 도로 동쪽에는 미곡전, 관곽전(관과 궤인곽을 파는 가게), 지혜전(종이와 신발 가게), 읍내북쪽에 유철전(놋쇠와 쇠를 파는 가게) 등이 중심의 네거리 중 행궁 쪽을 제외하고 시전이 설치돼 운영됐다. 

또한 1794년(정조18) 한해가 심하게 들어 온 나라가 어렵게 되자 정조는 성역을 중지하면서 생계를 마련하도록 명했다. 그해 11월 정조는 윤음(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을 내려 이르기를 북성 밖 척박한 땅을 개간할 것을 명하고 그 공사도 날품으로 하지 말고 일한 양에 따라 품삯을 주는 방안을 택하도록 했다. 

영화정도. 영화정 앞에 보이는 것이 만석거이다. 아래쪽으로 여의교가 보인다. 하류지역이 대유둔(대유평)이다. (자료=수원시)
영화정도. 영화정 앞에 보이는 것이 만석거이다. 아래쪽으로 여의교가 보인다. 하류지역이 대유둔(대유평)이다. (자료=수원시)

화성유수 조심태는 1795년 윤2월 을묘원행으로 내려온 정조에게 개간 방안을 보고하고 곧 만석거 조성공사 시행에 들어갔다. 1796년 정월에 화성을 들러 만석거를 둘러본 정조는 "수문의 석각은 하늘이 이뤄 놓은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이 이렇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도다"했다.

만석거를 축조 한 후 정조 21년과 22년 연이어 발생한 재해에서 수원지방은 극심한 가뭄을 이겨냈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만년제와 축만제를 추가로 만들고 순조 대에는 남제를 축조했다. 만석거 주변의 대유둔은 66섬지기(1섬지기는 2천평~3천평), 만년제 주변은 62섬지기, 축만제 주변은 232섬지기라고 19세기말 수원부 읍지에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자급자족 도시의 기반이 마련됐다.

신읍 화성의 조성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 발단이었으나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영국의 전원도시의 기능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신도시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신도시 화성의 정신을 이어 받아 자족도시를 건설하는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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