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1636.인조13년) 전후 조정에서 척화(斥和)파와 주화(走和)파를 이끌며 대립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은 전쟁이 끝난지 수년 뒤에 심양(瀋陽)감옥에서 화해했다.

두 사람은 화해했다지만 백성과 나라는 아주 결딴난 뒤였다. 임금인 인조는 삼전도(三田渡)로 끌려나와 항복의 표시로 청(淸)태종 홍타시(弘他時) 앞에서 삼배고두례(三拜叩頭禮)를 행했다.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고, 강토는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혔다. 운좋게 살아 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굶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50만이 넘는 젊은 부녀자들과 건장한 청장년들이 포로로 잡혀 심양으로 끌려갔다. 여인네들은 청나라 오랑캐들의 노리개가 됐고, 남정네들은 노예로 팔려 나가 중노동과 채찍아래 신음하다 모진 목숨을 마감해야 했다. 참으로 기구하고 서럽고 원통한 조선이었다. 척화와 주화로 갈려 서로를 소닭 보듯 했던 조정의 심한 반목과 대립의 끝은 이렇게 참혹하고 비극적이었다.

당시 현실은 도외시한 채 대의명분에만 집착했던 친명반청(親明反淸)은 수많은 백성의 죽음과 파멸을 부른 허세였다. 이런 대의와 명분이라면 애당초 입밖에 내지 말았어야 옳았다. 청적(淸賊)의 기세 앞에 나라는 요절나고 백성은 도륙될 것이 뻔한 마당에도 그 잘난 대의명분을 주문처럼 되뇌어야 했었느냐 말이다.

요즘 일제 강제징용 문제 해결과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회복을 천명한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 결과를 두고 많은 국민과 야권의 반발이 무척 거세다.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일본 가해기업이 배상하라는 우리 대법원 판결과 달리, ’제3자변제’ 를 결정한 윤 대통령의 결단이 비난의 촛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망국적인 굴욕외교 등의 비난을 퍼붓는가 하면 매국노 이완용까지 들먹이며 대통령 탄핵마저 거론한다. 387년 전 병자 호란이 일어나기 앞서 지리멸렬했던 조선 조정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지점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는 따지고 보면 전임 문재인 정부가 집권 내내 뭉개온 현안이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는 지금껏 삐걱거리며 엉거주춤한 상태였다. 그 걸림돌을 이번에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수상을 만나 단숨에 빼버린 것이다.

제3자 변제라는 해결방식이 물론 아쉽다. 국민과 야당, 그리고 일부 피해당사자들이 강하게 반발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당면한 현실이 너무 급박하다. 무작정 과거에 매몰돼 현재와 미래를 방치할 수 없다. 

세계는 지금 한•미•일•호주• EU (유럽공동체) 등 자유진영과 패권 확대를 노리는 중국 및 러시아와 북한 등 권위주의 독재진영간 냉전구도로 재편되고 있다. 탈(脫)세계화 추세 속에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미묘한 국제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추호의 방심과 안일도 허락치 않는다. 북한의 핵무기 증강과 위협,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과 중국몽(中國夢)등 패권 확대 움직임, 러-우크라 전쟁 및 자원의 무기화, 공급망 확대 및 반도체 전쟁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현안들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북한의 핵무기 증강과 위협, 중국의 대한(對韓) 영향력 확대 노골화, 공급망 확대 및 반도체전쟁은 우리가 반드시 이겨내야 할 거대한 격랑(激浪)이다. 한-미-일 동맹 체제를 공고히하지 않는 한, 중국의 팽창과 북한의 핵무기 위협을 무력화시키기 어렵다. 촌음을 다투는 반도체 전쟁에서도 승리를 기약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일 양국 관계 회복과 강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두 나라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지향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뼈아픈 과거는 가슴에 묻되, 잊지는 말자. 그리고 이제 선진국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게 처신하자.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이 무엇이 아쉬워 일본에게 배상을 매달리는가. 지난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으로 과거배상문제가 일단락됐다는 국제법 전문가들의 견해를 냉철한 이성으로 받아들이자. 아예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던 중국이나 대만의 자존심엔 미치지 못할 망정, 국제사회에 초라한 모습으로 비쳐져서야 되겠는가. 사과나 반성 요구도 이쯤에서 접자. 그동안 일본이 마음이 내켰든지 안내켰든지 간에 수십번이나 사과와 반성을 했다는데, 억지춘향식 사과와 반성을 천 번 만 번 요구하고 또 받은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화해는 피차 손에 들었던 도끼를 땅속에 묻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상대를 향한 도끼를 묻어버리자. 독일과 프랑스, 프랑스와 영국이 각각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의 강제징용 피해자들도 이젠 가슴에 품은 도끼를 던져 버렸으면 하는 게 우리 국민 상당수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이들의 요구는 정당하고 일제(日帝) 불의(不義)에 대한 당당한 대의이지만, 우리나라의 국익에 비춰보면 그 또한 소의(小義)이자 사의(私義)다. 어느 쪽에 서야 할지는 자명하다. 야권의 망국 굴욕외교 등의 주장도 정치적 수사로는 얼마든지 선명해 보인다. 허나 미래지향적 관점에서는 병자호란 때 백성과 나라를 파탄시킨 것과 같은  완고한 대의명분일 뿐이다. 설마 김상헌의 말처럼 "죽지 않는 사람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 없으니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도리를 거스르는) 역(逆)을 따를 순 없다"는 병적 고집은 아닐 것이다. 또 설마 이 땅의 종북친중 세력처럼 우리나라를 지켜 보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북한과 중국을 위해 목숨바치려는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오늘날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변화막측한 세계에서 원칙과 이상만을 좇는 고루한 대의명분만으론 국민도 나라도 국익도 지켜낼 수 없다. 병자호란을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했던 충신 최명길이 김상헌에게 했던 말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끓는 물과 얼음도 다 물이고, 가죽옷과 갈옷도 다 옷이다. 나는 권도(權道)를 행했을 뿐이다."

권도는 원칙이 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알맞게 행하는 임시변통의 방법이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