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4월 17일(토), 추적추적 봄비 내리는데, 일송 김동삼(1878. 6. 23–1937. 4. 13)의 영구(靈柩)는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을 떠나 미아리 조선 사람이 장작불로 진행하는 사설 화장장으로 갔다. 앞서 영결식에서 여운형, 홍명희, 방응모, 이극로, 이인, 허헌 등 당대 50여 인사들이 추도하는 가운데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가 대성통곡하였다. 제자 최범술(1904-1979)과 김관호는 전무했던 특이사항이라며 관련 기록을 남겼다. 이날 18살 홍안의 조지훈(1920-1968)도 아버지 조헌영(1901-1988)과 참여하였고, 비통하고 장중한 식장의 정서와 분위기를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1950년대 이래 시대의 부정과 불의를 규탄하며 지식인과 지도자의 ’지조(志操)’를 강조하다 별세한 시인 조지훈은 그 전해에 일송을 추모하는 노래의 작사를 청탁받았다. 병석에서 붓을 가다듬으며 지은 가사는 다음과 같다. (작곡 이강숙)        

  

어둠 속에 횃불 들고 일어나라 외치시던 님

빼앗긴 조국 되찾으려 눈물 뿌리며 강을 건넜네

호지(胡地)에 밭 갈고 글 가르치고 독립군 길러 원수와 싸우기

아 광야의 비바람 몇 세월인가 

님은 뜻 한평생 여기 바쳤네

심상(尋常)한 들사람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그 이름아

 

어려운 일 앞장서고 공(功)은 항상 남 주시던 님

갈라진 생각 되 합치려 웃으며 두 손길 어루만졌네

사악엔 추상(秋霜)같고 열일(烈日)같고 의를 위핸 목숨도 홍모(鴻毛)와 같이

아 철창(鐵窓)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丹心)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그 이름아       

 

 근대 인물 중 매천 황현(1855-1910)과 일송 김동삼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던 조지훈. 그의 이 가사는 일송의 삶을 깊이 이해한 결과의 산물로 오늘 우리가 일송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피기에 수월하고 간략한 그의 전기(傳記)이다. 

 1910년 8월에 망국(亡國)이 닥치자, 국내 투쟁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일송은, 신민회의, ‘만주로 망명해 기반을 조성하며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진공(進攻)하여 광복을 쟁취하자’는 전략을 이회영(1867-1932) 형제들과 1911년 1월 먼저 실천하였다. 석주 이상룡(1858-1932), 백하 김대락(1845-1914), 월송 김형식(1877-1950) 등과 가족, 교감으로 재직하던 협동학교 출신 청년들과 안동 임하면 천전 일대 마을 사람들과 집단으로 고향과 이별하였다. 1절 1, 2행은 그 사실을 그렸다. 3, 4, 5행은 그 이후 20여 년 험난한 투쟁, 6, 7, 8행은 일송의 그 인고와 의지를 추념하며 기린 송사(頌辭)이다. 일반 독자들은 이 구절들을 관습성 칭송으로 알기 쉽겠지만, 부정과 불의, 과장과 아부를 극도로 혐오한 조지훈의 성격과 인품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찬사일 것이다. 2절 1, 2행은 일송이 독립운동 내부에서 존경받는 이유였기도 하다. 청산리대첩 이후, 경신참변과 자유시사건을 거친 뒤, 만주지역의 남은 독립군이 재기하려면 통합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일송은 서산 김흥락(1827-1899)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부터 권력을 멀리하며 ‘선공후사(先公後私)’와 ‘견위수명(見危授命)’에 투철하였고, 이런 지향으로 특히 좌우로 ‘갈라진 생각’을 ‘되 합치려’는 통합운동에도 충심을 다하였다. 이러한 평판이 아니었다면 1922년에 전만한족통일회(全滿韓族統一會) 결성에 따라 발족한 통의부(統義府)의 총장에 취임할 수 없었을 것이며,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와 윤해(1888-1939) 등이 일송을 의장으로 추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어느 현장에 있었던 이강훈(1903-2003)은 뒷날 ‘일송은 좌우 인물 모두가 신뢰하고 존경하였다’고 회고하였다. 3행에서 ‘사악엔 추상(秋霜)같고 열일(烈日)같고 의를 위핸 목숨도 홍모(鴻毛)와 같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님의 침묵』의 대시인이며 철벽 의지로 일제를 거부한 위대한 선승 만해의 그 통곡에 호상(護喪)이던 김관호가 이유를 물었고 만해는 대답하였다. “필자[김관호]가 종용히 물으니, 선생[만해] 말씀이, ‘유사지추(有事之秋)가 도래하면 이 분이 아니고는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한다. … 일송을 잃는 것은 전 민족의 큰 손실이요, 장래의 큰 불행’이라고 단언하셨다. … 그 후 8.15를 만났으나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 단합이 안 되고 계속 투쟁하는 것을 보며 8년 전 예견한 그 말씀이 적중한 것을 느끼었다.” 

 일송은 일제의 만주 침공에 대응하는 활동을 하던 1931년 10월에 하얼빈에서 밀정의 사찰로 일제에 피체되었다. 1934년 옥중에서 늑막염 등 고문 후유증으로 신음하며, “내가 죽을 이곳은 풀밭이나 산중에서 죽은 무명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과분한 장소’”라고 탄식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고 유언하였다. 그날 시신은 더디게, 더디게 화장되었고, 다 타지 못했던, 아니, ‘다 타지 않았던 체백(體魄)’은 서해로 흐르는 한강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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