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지만 시는 평이한 설명 위주의 산문이 아니라 여러 비유와 상징과 알레고리가 개재되고, 게다가 어떤 내포와 뉘앙스, 어떤 어조까지 함축되며, 과감한 생략과 일탈과 변조도 감행되어, 매력이 남다른 언어예술이다. 그래서 시인의 비전과 주관과 다른 경험과 안목을 지니고 있는 독자들은 그 독해와 향유가 곤란하거나 난해하여 오히려 흥미를 잃을 수 있다. 미국 신비평가들이 정리한 ‘의도의 오류’(작품의 의미보다 시인의 의도 모색 우선)와 ‘감정의 오류’(독자 입장에서의 과잉 편향 해석)는 어떠한 독해와 비평에서도 감내하여야 할 출발선이자 한계로 인정하여야 할 종료선이기도 하다. 즉 사실은 하나지만 의견은 복수이며,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근년에 여러 이유에 기인하여 고의 여부를 떠나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문제 하나에 생각과 의견을 달리하며 대립과 갈등을 줄기차게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근년 들어 우리 시단에는 시의 애매성 확대가 추세를 이루고 있으며,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있는 장형화(長型化)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서정시는 상기 특성과 더불어 짧은 길이가 그 정체성의 하나였다. 두 현상을 이전과는 다른 지향을 표방하는 시사 차원의 물결로 인정하는 시선이 주류이지만 온도 차이는 다양한 듯하다. 최근에 한 계간지가 이 문제를 다루었다.[문장 과잉의 시대 : 「시는 왜 자꾸 길어지나」(오민석), 「전통에 대한 도전인가, 혁신에 대한 강박인가」(김나영), 『다층』, 2023년 여름호] 후자 현상에 관련하여 “내적 필연성이 있을 때 시가 길어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가 짧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당위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고 내적 필연성과 길이의 일체를 강조하고 있고, “말의 고삐를 그러쥐고 있지 않으면 감정을 단속적으로 장악하기보다는 감정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방치하게 된다. 그때 마구 뿔뿔이 달아나는 말의 흘러넘침을 혹시 자유로운 상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라고 묻는, 용기 있는 충정을 피력을 하고 있다. 두 입론은 애매성 문제도 포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같은 잡지의 다음 표제작을 읽었다.  

 

백주 염천에 침상에 누운 그녀가

눈이 온다고 전화를 했다

일기예보보다 정확한 그녀가

백사장에 끌려나온 고래처럼 그렁거렸다

젖은 속옷에서 하얀 소금이 서걱거리는데

한데서 자지 마라 한데서 자지 마라

어차피 비도 눈도 처음엔 다 얼음인데

마음이 한데이니 도리가 없는데

폭염주의보가 반도를 진득이 띄우고 있는데

백주 염천에 눈이 온다고 전화가 왔다

낮의 울대가 길어지는데

백년 후에 서울엔 눈이 멸종된다는데

선풍기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개는 집을 나와 내 앞발을 핥고 있다

 

계절은 그만

정전(停電)해라!

                        - 「스위치」/전형철

 

 필자도 이 시가 해석과 향유가 크게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중용의 시가 아닌가 한다. 기후 이상으로 야기한 지구의 심각한 병변, 그 재앙에 스스로 직면하고만 인류의 탐욕, 그리고 그 비판과 우려가 주제. 우리가 감상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은, ‘백주 염천에 눈이 온다’고 화자에게 전화한 ‘백주 염천에 침상에 누운 그녀’가 누구인지, 아니 그대로 이해해도 좋지만 무엇을 가리키는 은유인지 그 정체가 궁금하고, 불연속 구성의 국면으로 보이는 시행, ‘한데서 자지 마라 한데서 자지 마라’가 구성의 어떤 필연성에서 기인하는지도 탐지하며, ‘계절은 그만/정전(停電)해라!’는 절규와 그 여운을 음미하는 접근일 것이다. 

 주제가 낯설지 않지만 다시 살펴보면 시가 제기한 정경은 기괴하다. 작열, 그 꼬리가 침 삼켜지듯 길어지는 무정한 태양, 빽빽하고 뜨겁고 무겁게 가라앉는 열기, 그 가운데 떠있는 불안한 반도, 예정된 백년 후 눈 멸종.

 무더위에 좌절과 위구의 심정으로 ‘한데’서 자는 화자에게 ‘그녀’는 ‘한데서 자지 마라 한데서 자지 마라’고 거듭 애정 어린 염려의 권유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이 시행은 돌발이 아니라 그녀의 출현과 더불어 이미 예정된 목소리이며, 출현하지 않으면 미흡으로 지적될 이 시의 주요 메시지이다. 그런데 그녀는 ‘백사장에 끌려나온 고래’로 비유되며 ‘그렁거렸다’. 큰 바다에서 유유히 헤엄치다가 작열하는 한데 백사장으로 끌려나온 위기의 고래. ‘백주 염천에 침상에 누운 그녀’의 상태이다. 그녀는 기후 이변으로 화자보다 먼저 앓는 위대한 훼손된 존재. 그런 그녀가 이어 전언한다. ‘백주 염천에 눈이 온다’고. 역설의 인상 깊은 경고로 기후 이변의 부조리를 잘 형상화한 언급이다. 그래서 선풍기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고, ‘개’도 자기 집을 나와 역시 그렇다며 화자의 ‘앞발을 핥’으며 호소한다. 우리도 우리의 앞발을 핥는 개의 혀가 감촉되는 듯하다. 

 그래서인가 더 참지 못하고 화자는 외친다. ‘계절은 그만/정전(停電)해라!’고. 앞에서 주시한 모든 현상을 이 괴이한 계절로 통괄하고, 그 진행 중지를 기원하는 화자의 목소리. 기후 이상으로 야기된 폭염과 무더위에 시달리는 요즘 우리 모두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듯한 비명이 아닐까.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절규」가 짐짓 연상된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질병 사망 체험이 발작하듯 야기한, 비애와 고통과 공포. 그 유사한 교합 폭발과 같은 암울하고 비통한 목소리가 지면을 찢고 나와 우리에게 들린다. ‘백년 후에 서울엔 눈이 멸종된다는데’ 

 우리는 이 경고에 내포된 막심한 탄식에 접응하면서 기후 이상을 제어하는 녹슨 스위치, 어느덧 붉게 달아오른 스위치를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다시 읽다가, 애매성과 길이를 절제한 시인의, 작품과 무관하면서도 유관한 의도도 감지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