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고귀한 지위에 있다 해도 교육자라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행정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반추해 보고 싶어 옛 일을 떠올립니다. 교육자가 교육행정가보다 한 수 위라는 시시한 얘기는 아닙니다.

교장들을 한군데 다 불러놓고 부하 관료들과 함께 기세 좋게 등장한 교육감은 가관이었습니다. 박○○ 선수, 김○○ 선수 같은 인재를 길러내는 학교가 명품학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인재는 장차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도 했습니다. 한 시간에 걸쳐 단지 그 이야기를 해놓고는 의기양양 다시 그 관료들을 거느리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강당은 썰렁하고 씁쓸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돌연 ‘명품학교’라는 단어가 혐오스러워져서 결코 그따위 학교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느 학생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보통학교’를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린다는 것인지,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되는 것인지, 혹 그 교육감은 관내 교직원들을 자신이 다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 선수들을 공교육이 만들어낸 인재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더 언급하기가 구차하지만 그는 진실로 그렇게 여기는 바보였는지 사람들이 떠받드니까 ‘멘붕’ 상태가 되어 그것조차 착각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공교육은 이제 그런 교육까지 맡아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한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지나가는 여행객을 잡아서 자신의 침대에 눕혀 자기보다 큰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작은 사람은 잡아 늘였다는 그리스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 식 교육을 하자는 것이냐는 이분법적 사고의 항의를 받을까 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그 교육감이 임명한 어느 교육장도 부임하자마자 인사를 하겠다면서 관내 교장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교사 시절에 선수양성에 혁혁한 업적을 쌓았다는 소문이 돌아서 교육감의 주장을 되풀이하려나 싶었는데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돕는 길은 학교에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교장은 수업도 없으니까 학생들이 즐겨 찾는 사각지대를 불시에 자주 순찰해서 언론에 오르내리는 귀찮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지도하기 바란다!”

오랜 세월 온갖 지식과 경험을 두루 쌓아왔을 교장들은 숙연하게 그 ‘훈시’를 받아 적는 슬픈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 학생들은 교사를 돕고 교사들은 교장을 돕고 교장들은 교육장을 돕고 교육장들은 교육감을 도와주면서 무릇 교육으로써 하급자가 상급자를 돕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인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교육감이나 교육장이나 그러면서도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행정가보다는 교육자로 불리기를 바랐겠지요.

장황했지만, 무엇보다 교장선생님의 교육관이 중요하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은 일이 발생하면 국회에서는 법으로써 학교사회를 행복한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듯 법을 고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비행은 자꾸 발생하고 심지어 학부모 중에도 비교육적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거듭되고 있습니다. 최근엔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하면 좌시하지 않겠다는 대책도 발표되었습니다.

언제쯤 교사와 학생들이 편안하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까요? 교사들이 끝까지 신뢰해야 할 것은 결국 법이나 규정, 관련기관의 행정력 같은 것들일까요? 그들이 따르고 싶은 대상은 교장선생님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령 교사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혹 교장선생님께서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법이나 규정, 먼 곳의 행정력 같은 것이 힘을 발휘할 수나 있을까요?

교육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 같아도 변화의 길은 아득한 느낌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 현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높고 낮은 수많은 교육행정가가 있지만 결국 어떤 경우에도 학생들을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교육자이거나 그렇지 못하여 오히려 교육을 방해하고 교사들이 하는 일에 훼방이나 놓는 못난 교육자로 구분될 수 있더라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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