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당 진찬연도 윗부분. 행차의 다섯째 날인 윤2월 13일 정조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해 진찬례를 올리는 장면이다. 맨위는 혜경궁과 정조의 자리가 있고, 보개위에는 혜경궁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 여령과 악사들이 무고와 선유락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수원시)
봉수당 진찬연도 윗부분. 행차의 다섯째 날인 윤2월 13일 정조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해 진찬례를 올리는 장면이다. 맨위는 혜경궁과 정조의 자리가 있고, 보개위에는 혜경궁 친척들인 의빈과 척신들, 여령과 악사들이 무고와 선유락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수원시)

화성능행차 다섯째 날(윤2월 13일) 행사는 8일간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진찬례(進饌禮)가 벌어지는 날이다. 여섯째 날(윤2월 14일)은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사미(賜米)행사와 고을의 노인들을 위로하는 양로연을 준비했다. 이어 화성을 둘러보는 행사를 가졌다. 오후에는 수행한 신하들과 활쏘기 대회를 갖고 격려했다. 이로서 화성에서 4일간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다섯째 날(윤2월 13일)은 이번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벌어지는 날이다. 이날은 오롯이 어머니만을 위한 날이었다. 잔치는 오전 9시경에 봉수당에서 시작됐다.

봉수당 마당에 보개가 마련되고 봉수당 전(殿)앞에 혜경궁과 정조의 자리가 마련됐다. 혜경궁이 앉을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리고, 그 뒤에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쳐졌다. 정조의 자리에는 표피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진채병풍(眞彩屛風, 단청그림 병풍)이 놓였다.

봉수당 진찬연도 전체 모습. 위 부분은 봉수당, 중간은 중양문, 아래 부분은 좌익문이다. 아래 부분엔 문무백관이 앉아 있다.위 부분 공연장면은 무고와 선유락을 추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무용을 한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는 화려한 소품들이 그려져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수원시)
봉수당 진찬연도 전체 모습. 위 부분은 봉수당, 중간은 중양문, 아래 부분은 좌익문이다. 아래 부분엔 문무백관이 앉아 있다.위 부분 공연장면은 무고와 선유락을 추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무용을 한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는 화려한 소품들이 그려져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수원시)

그리고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올리는 상이 배치되고 혜경궁에게 올릴 도구들이 배치됐다. 의식을 진행할 여관(女官), 여집사, 여령 등이 먼저 들어와 대기했다. 이어 의빈(儀賓), 척신(戚臣), 배종한 사람들이 융복(戎服)을 입고 자리에 들어와 섰다. 내명부, 외명부가 지리에 섰다. 자리가 마련되자 여관(상궁)들이 혜경궁 계신 곳으로 가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혜경궁과 정조가 등장할 때 여민락이 연주되고, 자리에 앉자 향불이 피어오르고 음악이 멈추었다. 이어 혜경궁께 휘건(손수건)이 바쳐지고, 음식상과 꽃을 올리는 의식이 끝나자 부복(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다) 했다가 일어났다. 이어 정조가 술잔을 올리고, 치사(致詞, 찬양의 말)를 드리자, 혜경궁은 “전하(정조)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한다.”라는 선지(宣旨, 임금의 명을 선포함)를 내리고 술을 마셨다. 

정조는 절을 하는 자리로 가서 세 번 고두(叩頭,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함)한 다음 ‘천세천세 천천세'를 불렀다. 모든 참가자들이 따라했다. 정조는 자리로 돌아갔다. 정조에게도 휘건, 찬안과 꽃이 전달됐다. 이어 참가자들에게도 음식과 꽃이 전달됐고, 춤과 음악이 연주됐다. 이어 찬안이 치워지고, 정조와 참가자들이 다시 배위(背違, 절하는 자리)로 가서 혜경궁에게 재배한 다음 자리를 떠났다.

정조는 잔치가 끝난 후 총리대신과 정리소의 당상과 낭청들을 모두 들어오게 한 후 영의정 홍낙성 등에게 말했다. “내가 소자(小子)로서 몇 년간을 기축한 것이 바로 오늘의 진작인데, 날씨도 청화하고 어머님의 건강도 강녕하시니 기쁘고 경사스런 마음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백관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꽃을 나누어 주도록 명했다. 

승지와 사관, 각신들을 들어오게 한 다음, 행좌승지 이만수에게 어제시를 써주고, 연회에 참여한 신하들이 화답하는 시를 쓰도록 명했다. 

이어 “오늘의 의식은 실로 천년 만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오는 갑자년에 어머니께서 칠순이 된다. 10년 후에 경사가 거듭 돌아옴을 기다리게 하라.”했다.

여섯째 날(윤2월 14일). 화성능행차 여섯째 날에는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행사와 오전에 양로연, 오후에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 득중정에서 활쏘기가 예정되어 있었다.

화성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행사는 미리 대상자를 선발했다. 대상자는 사민(四民, 환과고독),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를 말하며 진민(賑民, 구휼이 필요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말한다. 이들을 한곳에서 쌀을 나누어 주지 않고 네 군데로 나누어서 주었는데, 도시지역은 행궁의 신풍루에서 정조가 친림하여 사미(賜米, 쌀을 나누어줌)하고, 주변지역은 승지들을 지역의 산창, 사창, 해창에 보내어서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때 화성부 인구 6만 명 중 10분의 1이 368석의 혜택을 받았으므로 형식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이날 신풍루 2층 누각에 자리를 마련하여 앉았다. 동부승지 이조원에게 “너는 내려가서 쌀을 배급하고 죽을 똑같이 나누어 먹이되, 쌀과 죽이 어머니의 뜻임을 알리라.”라고 했다. 정조는 냉죽을 먹이지 않을까 하여 죽을 가져오라하여 확인하였다.

정조는 다시 행좌승지 이만수에게 “오늘 양로연을 베풀려고 하는 것은 노인을 존경하기 위함이니, 노인들이 밖에서 오래도록 기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조는 낙남헌으로 갈 것이니 경은 이곳에 남아 사민(四民)이 와서 기다리면, 일일이 죽을 먹일 것이며, 혹시 뒤늦게 오는 자가 있더라도 냉죽을 먹이지 않도록 하라.” 이렇듯 정조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

두 번째 행사는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일이었다.

8일간의 화성능행차가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위한 것인 만큼, 화성의 노인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었다. 양로연 초대는 행차를 위해 내려온 영의정 홍낙순을 비롯해 노인관료 15명과 화성에 사는 384명이었다.

낙남헌 양로연도. 행차 여섯째 날인 윤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홍낙성을 비롯한 노인관료 및 화성 현지의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어좌앞 마루에는 융복차림의 노대신들과 관원들이 있고, 섬돌 앞뜰에는 정조가 내린 노란 손수건을 지팡이 머리에 매고 앉아서 비단 한단씩 받은 노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담장 부분에는 여령과 악사들이 보인다. (자료=수원시)
낙남헌 양로연도. 행차 여섯째 날인 윤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홍낙성을 비롯한 노인관료 및 화성 현지의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어좌앞 마루에는 융복차림의 노대신들과 관원들이 있고, 섬돌 앞뜰에는 정조가 내린 노란 손수건을 지팡이 머리에 매고 앉아서 비단 한단씩 받은 노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담장 부분에는 여령과 악사들이 보인다. (자료=수원시)

정조는 삼엄(三嚴) 준비가 끝났다는 북이 울리자 융복을 입고 낙남헌에 나와 앉았다. 한양에서 내려온 노인관료들은 지팡이를 짚고 전(殿) 위로 올라갔다. 2품 이상은 기둥 안으로 들어가게 하고, 3품 이하는 계단위에 앉았다. 나머지 노인들은 자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계단 밑에 앉았다. 

정조는 노란 비단 손수건을 나누어 주어 지팡이에 매게 하고, 비단 한 단씩을 나누어준 다음, 음식을 내오게 하고 연악(宴樂)을 연주케 했다. 정조는 어제시를 내걸게 하고, 참석자들에게 화답시를 쓰게 했다. 화성에 살면서도 적(籍)이 없어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도 들게 하라고 일렀다. 관광하는 사람 중에 노인이 있으면 술과 음식을 대접하라고 했다. 채제공은 저 인파 중에서 절반은 노인이라고 하자, 상서로운 일에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이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주자 이들은 천세(千歲)를 외쳤다.

정조는 화성안을 자세히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예정된 행사가 거의 끝나자 정조는 모처럼 시간을 내었다.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으로 갔다. 이곳은 장안문, 화홍문, 유천, 용연, 광교산과 어울려 평상시는 시정(詩情, 시적인 정취)을 자아내는 절경이지만, 화성 동북방의 방어의 요해처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 정자는 평면이 만자형(卍字形)이고, 지붕이 세 번 꺾이면서 중앙으로 모아져 첨탑형식을 하고 있어,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다. 정조는 이곳에서 감회가 큰 듯 “장용외사가 성심으로 일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될 수 있었겠는가 하며… 이 좋은 장수를 만난 때문이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고 했다.

화성행차의 마지막 행사는 활쏘기로, 수행한 신하들과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남겨두고 있었다. 정조는 학문도 뛰어났지만 무예와 활쏘기도 뛰어났다. 활쏘기는 단순한 무예가 아니었다. 정신을 집중시키는 수양방법이기도 했다. 

정조는 이날 활쏘기에서 단연 우승자였다. 신하들이 혹시 고의로 양보했을지도 모르지만 정조의 활솜씨가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정조는 “활쏘기는 비록 육예(六藝, 주나라때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서예, 수학) 중 하나라고 하지만, 역시 기(技)에 가깝다. 그래서 하지 않은지 4년이 지났는데 오늘의 명중은 우연일 뿐이다,”라면서 겸손함을 보였다. 

정조는 나이가 많은 홍낙순을 보고 “경은 팔순의 원로로서 소포를 세 개나 맞춘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라고 하면서 격려했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식사를 마치고 해가 저물자 야간 활쏘기를 준비하라고 명했다. 작은 표적을 설치하고, 횃불 두 개를 표적 좌우에 설치하게 했다. 정조는 2순을 쏘아 다섯 개를 맞추었다. 

활쏘기가 끝난 뒤 득중정에서 매화포(땅에 묻은 화약)를 터뜨렸다. 득중정 활쏘기를 끝으로 화성에서의 모든 행사가 끝났다.

화성에서 4일간의 일정은 정조의 말처럼 ‘천재일우지회(千載一遇之會)’ 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완성한 행사였다.

 

화성문화제에서 정조대왕과 ‘천재일우지회(千載一遇之會)’를 만나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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