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지방 대동여지도. 1834년 김정호가 작성한 대동여지도를 통해 수원지방이 명당임이 표현된 지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연결된 산맥이 안성 칠현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이다. 용인 석성산을 거쳐 광교산~오봉산~수리산을 거쳐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진다. 광교산을 주봉으로 동쪽은 곡반정동까지, 외곽으로는 청명산을 거쳐 경희대, 세마대 죽미령을 지나 독산성에 이어진다. 서쪽은 칠보산을 거쳐 화산 융·건릉으로 이어져 수원은 내부 산맥과 외곽의 산맥이 형성되어 분지를 이룬다. 분지에는 4개의 하천이 하류 황구지천으로 모아진다. 또한 8방향으로 길이 뻗어있어 4통8달한 곳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지방 대동여지도. 1834년 김정호가 작성한 대동여지도를 통해 수원지방이 명당임이 표현된 지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연결된 산맥이 안성 칠현산에서 분기한 한남정맥이다. 용인 석성산을 거쳐 광교산~오봉산~수리산을 거쳐 김포 문수산까지 이어진다. 광교산을 주봉으로 동쪽은 곡반정동까지, 외곽으로는 청명산을 거쳐 경희대, 세마대 죽미령을 지나 독산성에 이어진다. 서쪽은 칠보산을 거쳐 화산 융·건릉으로 이어져 수원은 내부 산맥과 외곽의 산맥이 형성되어 분지를 이룬다. 분지에는 4개의 하천이 하류 황구지천으로 모아진다. 또한 8방향으로 길이 뻗어있어 4통8달한 곳이다. (자료=수원시)

수원은 지리적으로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거기에 더해 훌륭한 인재를 만나면서 발전했다. 

첫째, 백두대간에서 비롯된 한남정맥의 주봉인 광교산은 지맥에 화산(花山)을 만들었다. 수원 구읍 화산은 800개의 산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불렸다.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의 산맥은 동서로 에워싸 분지를 이뤘는데 이로 인해 수원은 단일 수계를 형성해 타지방의 물이 넘어 오지 않는 지형이다. 즉, 내 땅 물만 처리하게 됨으로 주변의 영향을 받지 않아 물로부터 안전한 도시가 됐다.

둘째, 수원은 지리적으로 수도 서울의 관문에 위치했다. 1794년(정조18) 예조판서 겸 예문관대제학 홍양호는 장안문 상량문에서 “화성은 큰 도읍지요 수호해야 할 땅이다. 땅은 바다를 등지고 한강에 임해서 서울 백리의 경계에 걸터앉았고 영남을 당기고 호남을 눌러서 큰 길이 사방으로 통하는 곳에 자리 잡았네” 라고 표현하여 수원이 지리적으로 요충지임을 밝혔다.

풍수지리에서는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음택, 산사람의 집터를 양택으로 구분 한다. 

수원이 명당임을 알아본 사람은 선조 때 좌의정 기자헌이었다. 기자헌은 선조의 능을 수원의 화산에 써야 한다고 했다. 효종 때 윤선도 역시 효종의 능자리로 수원부 화산이 최고라고 했다. 반계 유형원은 수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북평(北平)에 있는 팔달산자락으로 읍치를 옮기면 장차 1만호가 되는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수원의 뛰어난 지세를 알아본 사람은 위대한 군주 정조대왕이었다. 정조의 마음을 대변한 사람은 금성위 박명원이다. 1789년 7월 11일(정조13년) 어전회의에서 전하(정조)께서 왕자가 없는 것은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이 흉지이기 때문이므로 명당으로 이장을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수원의 지리적 장점을 모두 취했다. 음택 명당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쓰고, 양택 명당에 신읍을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기용했다. 

정약용에게 화성설계를 맡겨 화성축성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게 했다. 채제공에게 화성건설의 총리대신 겸 초대 화성유수를 맡겨 현륭원 조성과 신읍, 화성건설의 총책임을 맡겼다. 조심태는 수원부사로 임명해 현륭원과 신읍, 화성축성의 실무를 전담케 했다. 정조는 이들을 기용해 역사에 길이 남을 현륭원과 화성 건설을 이룩했다.

정조는 “우리가 이룩한 역사(役使)가 사사로이 한 일이 아니므로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자세한 기록을 남기라”고 주문했다. 당시 현륭원을 조성한 기록, 화성을 만든 기록, 혜경궁홍씨 회갑연을 수행한 기록 등과 ‘홍재전서’, ‘승정원일기’ 등의 많은 기록을 남겼다.

현륭원과 신읍, 화성건설에 참여한 이들 또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 채제공의 ‘번암집’, 조심태의 ‘수원부하지초록’ 등이다. 이외에도 수원유수를 지낸 많은 이들이 문집과 유물을 많이 나겼다.  

지리적으로 좋은 여건과 훌륭한 인재들의 노력으로 건설된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됐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은 이병희 국회의원이다. 박정희 정부가 중점사업으로 추진한 국방유적 복원사업에 수원화성 복원사업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는 경기도청이 수원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1963년 수원유치를 성사시켰다.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유치하고, 뒤이어 성균관대학을 수원에 유치했다. 이는 수원발전의 초석이 됐다. 

이후 수원문화원장인 심재덕은 수원화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한다. 화성행궁 자리에 위치한 경기도립병원(수원의료원)이 그 자리에 현대식 건물을 다시 짓겠다고 하자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임사빈 도지사를 설득, 경기도립병원을 연초제조창 옆으로 이전해 짓게 했다. 초대 민선시장이 되어서는 화성행궁 복원에 열중했다. 이어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는 일에 몰두했다.

혼신을 다해 2002년 월드컵경기를 수원에 유치했다. 그러면서 외국관광객들에게 부끄러운 화장실을 보여줄 수 없다하여 화장실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화장실 문화를 일거에 바꾸는 쾌거였다. 이러한 활동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화장실 문화 개선운동을 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수원은 지리적으로 뛰어난 장점을 가진 고장이다. 수원은 여기에 조선시대 탁월한 지도자 정조와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 화성유수 조심태, 국회의원 이병희, 수원시장 심재덕 등 탁월한 인재들이 중요한 변곡점에서 뛰어난 지혜를 발휘했다.

수원은 전국적으로는 광역시인 울산의 인구를 뛰어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의 수원은 인접 도시에 비해 행정구역이 협소하다. 대도시로 성장하는 인접의 용인, 화성, 오산, 평택 등과 역할 분담이 필요한 시점이다. 행정, 교육, 문화관광, 연구개발 등의 전략이 필요하다. 선조들의 뛰어난 지혜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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