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영토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며 지명 비정(比定)의 정확성은 영토 연구의 정확성을 좌우한다. 역사학적인 또는 정치적인 속성으로서의 영토가 아닌 언어학적인 ,지리학적인 관점에서의 지명(특히 고대시대의 지명)에 대한 철저한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광교산은 수원시 상광교동에 위치한 산이다. 백두대간의 한남정맥 구간의 주봉으로서 그 산자락이 수원, 성남, 용인, 의왕시에 걸쳐있다. 최고봉인 시루봉(582m)을 중심으로 북서쪽에는 백운산(566m), 바라산( 427.5m), 남쪽으로는 형제봉(448m)이 위치하고 있다.

광교산은 풍수지리학 측면에서 수원의 진산(鎭山)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광교산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고문헌에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화성지등』이 광교산을 기록하고 있다. 『수원군읍지』에 “(광교산은) 일명 광악(光嶽)이라고도 한다. 야사에 고려때 산에서 기운이 하늘에 뻗쳐 이를 부처의 혼령이라 해서 불교를 취하여 광교(光敎)라고 산 이름을 짓게 된 것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광교산.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광교산.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형제봉과 광교산 사이에는 종루봉(비로봉)이 있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과정에 공략한 58개 성중에 종고루성(宗古婁城)의 멸오(滅烏)와 매홀(買忽)이 용인과 수원의 옛 지명이다. 이 종루봉이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의 많은 성(城)들 중에 현재의 지명과 연결하여 볼 때 종고루성(宗古婁城)일 확률이 높은 것으로 많은 학자들의 논문에 나타난다.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위에 성(城)에 관계되는 지명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고봉인 시루봉은 이곳의 축성된 모습이 마치 시루처럼 보이기에 불린 이름이다. 시루봉은 산의 8부 능선에 돌이나 흙으로 성벽을 쌓게 되자 그 모습이 마치 시루에 시루변을 붙인 것과 닮아 불리게 되었고, 퇴뫼식산성으로 전국에 140여개의 지명이 남아 있으며, 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많이 있다.

광교산 줄기인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의 백운산(白雲山)도 성(城) 있음을 나타낼 때 불리우는 지명이다. 성(城)의 옛말은 ‘잣’으로 잣백(柏)을 써야하나 흰백(白)으로 음차(音借)하여 대부분 사용하고 있고, 운(雲)은 어조사 운(云)을 대신하여 사용하고 산에 구름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설명하고 있다. 서울성곽 청와대 뒷산의 지명이 백운산인 경우도 성에 관련된 지명인 것이다. 

화성시 향남읍 길성리토성 옆마을 지명이 백토리(白土里)마을이나, 화성시 서신면 백미리(百味里) 마을 지명도 근처에 석산성이 있어 백(白)으로 음차하여 하얀 백토(白土)가 있다거나,백가지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란 설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백운산이란 지명이 전국에 59개의 산이름으로 남아있다.

 백운산에서 조금 더 가면 바라산이 나오는데 바라산은 산위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을 본다 하여 본래 망산(望山)으로도 불리기도 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발산(鉢山), 또는 바리산으로도 불리는데, 발산(鉢山)은 성을 의미하는 ‘ᄇᆞᆯ’에 어원을 둔 지명이라 생각한다.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바라산도 부근에 설봉산성이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화성시 남양장성의 당성에서 염불산 사이의 고개 이름이 바리고개인 점도 성에 관련된 지명이다. 화성시 정남면 발산리도 근처에 태봉산성이 있어 붙여졌으며, 정남면 망월리도 발산리와 동일한 지명으로 성과 관계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광교산 끝부분에 성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1997년 4월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롯데마트 인근에 임진산(해발130m)에서 임진왜란 당시 벌어졌던 치열한 광교산전투(1592년6월)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유물이 발견됐다. 

그냥 보잘 것 없던 임진산이 느닷없이 역사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삼성 레미안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조선시대 총통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총통 2점을 비롯한 무기,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백제시대의 타날문토기, 조선과 중국제 명문 도자기등이 다량출토 됐다. 

임진산성은 고대부터 조선시대를 아우른 복합유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풍덕천진지(豐德川陣址)로 처음 등장했고,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축성한 것이라 적혀 있으나, 당시 책임조사원이었던 백종오(역사고고학)교수는 “산성은 일본군이 쌓은 것이 아니라 전승업적을 남기려는 그들이 조작한 왜곡된 역사”라고 했다. 

임진산성은 야트막한 산 정상에 둘레가 100m 남짓 쌓은 진지형태의 토성으로 유구는 발굴조사 이전에 이미 훼손되어 정확한 구조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성벽은 남에서 북쪽으로 경사진 지형에 3.5m만 잔존하고 있는데, 흙을 다져 쌓은 판축기법으로 밝혀졌고,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무기류였다. 지형적으로 임진산성은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기록에는 임진왜란 당시 1592년 음력 6월 5일에서 음력 6월 6일 사이에 용인과 수원 사이에 있는 광교산 자락 근처(현 광교신도시 부근)에서 벌어졌던 전투가 있다.

임진왜란 육상 전투 중 조선이 가장 어이없이 실패한 전투로 꼽힌다. 이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00여명의 군사로 무려 30배 ~ 50배가 넘는 5만 ~ 8만여명의 조선군을 와해시켰다.

그날의 기록을 보자.(선조 수정 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1번째 기사)

“이튿날 아침 군중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갈 때 적병이 산골짜기를 따라 돌입했다. 흰 말을 타고 쇠가면을 쓴 장수가 수십 명을 데리고 칼날을 번뜩이며 앞장서서 들어오니, 충청 병사 신익(申翌)이 앞에 있다가 그것을 바라보고 먼저 도망하자 10만의 군사가 차례로 무너져 흩어졌는데, 그 형세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듯하였다. 이광·김수·국형은 30리 밖에 있었지만 역시 진을 정돈하지 못하고 모두 단기(單騎)로 남쪽을 향하여 도망하니, 적병 역시 추격하지 않았다. 병기와 갑옷, 마초(馬草)와 양식을 버린 것이 산더미와 같았는데 적이 모두 태워버리고 떠났다.”

또 다른 역사적인 근거가 있다. 197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김준룡장군 전승비가 수원 광교산 중턱 해발 400m쯤 되는 곳의 종루봉 아래 자연 암벽에 새긴 전승비가 있다. 중앙에는 큰 글씨로 '충양공김준룡전승지(忠襄公金俊龍戰勝地)'라고 새기고, 좌우 하단에 '병자호란공제호남병(丙子胡亂公提湖南兵)'과 '근왕지차살청삼대장(覲王至此殺淸三大將)'이라는 작은 글씨를 새겼다. 작은 글씨는 “병자호란 당시 공이 호남의 병사를 이끌고 임금을 뵈러 가는 길에 여기에서 청나라 대장 3명을 죽였다.”는 의미다.

규모는 세로 135㎝, 가로 40㎝이다. 전하는 말로는 수원화성을 쌓을 때 석재(石材)를 구하러 갔던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축성 책임자 채제공(蔡濟恭)이 이 사실을 새기게 하도록 하였다 한다.

김준룡은 전라병마절도사로 재임시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 태종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10일만에 국도 근교를 위협하게 되니 통솔하에 있는 친병을 이끌고 13일 만에 수원 광교산에 이르러 청군을 맞아 혼전을 벌인 끝에 청 태종의 부마(駙馬) 양고리(楊古利) 외 두 대장을 사살하고 대승하였다.

광교산 형제봉에서 산줄기를 따라 바라산까지의 지형을 볼 때 학익진형태의 산세가 용인 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으며, 산줄기는 급경사로 자연성으로 손색이 없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의 전쟁터로 지명과 산의 형태로 볼 때 광교산에서 바라산까지 광교산장성으로 역사적 장소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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