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수원화성 성신사를 찾은 김이환 선생.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지난 1월 수원화성 성신사를 찾은 김이환 선생.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오늘(12일) 이른 아침 몇 군데서 전화와 문자가 왔다.

“우리 화성연구회 김이환 초대 이사장님께서 어제 오후 영면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이환 이사장님은 안익승, 김동휘, 심재덕 등 내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지역 어른 중의 한 분이었다. 이 분들의 특징은 반듯한 성품을 갖고 수원을, 화성을, 그리고 후학들을 지극히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에 마지막 남았던 김이환 선생마저 내 곁을 떠났다.

1935년 10월 27일 출생, 아직 생일이 안 지났으니 만 나이로는 89세. 조금 더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와 함께 답사 여행도 다닐 수 있었는데.

평소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가고 싶다'며 이메일 주소에도 9988을 넣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10년을 채우지 못하셨다.

김이환 선생은 사단법인 화성연구회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우리와 만났다. 당시 이영미술관 관장이었던 그분을 우리가 이사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했다. 국무총리실에서 고위 공직을 역임한 경력과 문화예술에 대한 식견, 인품 등 무엇 하나 모자라는 데가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각이 옳았다. 선생은 남녀노소 전공 구분 없이 모든 회원들과 동락하며 10년 넘게 화성연구회를 이끌었다.

선생의 저서 ‘수유리가는 길’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고인은 1970년대 후반부터 박생광 선생(1904~1985년)을 후원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뜨는 순간에도 곁을 지켰다.

“3평 남짓한 좁은 방에 온갖 화구를 늘어놓고, 키가 160cm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화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칠십 평생 한길을 걸어온 삶에 절로 존경심이 들었죠. 그래서 매주 일요일 아내와 함께 선생의 수유리 작업실을 찾아갔어요. 선생이 필요하다는 물감은 외국에서라도 구해줬고, 그림을 위해 해외여행이 필요하면 동반해서라도 다녀왔고요. 힘닿는 데까지 전시회도 주선해드리고 지인에게 그림도 소개하고 그랬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생이 한 말이다. 이렇게 모은 작품들로 2001년 수원시와 경계지점인 용인 기흥에 이영미술관을 개관했다. 박생광, 전혁림 등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과 미술 관련 도서·자료 2만여 점을 소장한 경기도 최초의 사립미술관이었다.

이곳에서는 박생광 전, 전혁림 전 등 대규모 기획전시회를 비롯, 문화행사도 자주 열렸다. 화성연구회가 펴낸 책자 출판기념회, 나라만신 김금화 굿판, 경기도당굿 인간문화재 오수복 굿판, 시인과 화가가 어우러지는 누드크로키 등 우리는 그곳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고 없이 다녀갔다.

그 무렵인 25년 전에 이런 시를 썼다.

 

마침내 그림은 없고

돌은 없고

사람은 없고

하늘만 남아있다

주인 닮은 햇살 건공중에 가득하다

앞산 뒷산

새울음 풀벌레 소리만 보인다

                       -졸시 '이영미술관'

 

약 두달 전인 지난 1월 13일 화성연구회 신년회에 선생이 오셔서 건배사를 하셨다. 그 때도 몸이 불편해 보였지만 훌훌 털고 올해 봄 답사에 동행하실 줄 알았다.

올해 1월 13일 화성연구회 신년회에 선생이 오셔서 건배사를 하는 김이환 초대 이사장. 왼쪽은 최호운 화성연구회 이사장.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올해 1월 13일 화성연구회 신년회에 선생이 오셔서 건배사를 하는 김이환 초대 이사장. 왼쪽은 최호운 화성연구회 이사장. (사진=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그리고 3월 3일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최호운이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 새 회장으로 취임한다고 축사를 해달라는데 몸이 불편해서 갈 수가 없다. 미안하지만 우행(김우영의 호)이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면 안 되겠나. 축사를 대신 써서 읽어주면 고맙겠다.”

길지 않았던 통화에서 마지막이란 말을 너 댓 번이나 반복하시길래 “9988은 아직 멀었는데 무슨 마지막입니까. 얼른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라고 목소리를 약간 높였다.

“허허허 우행, 고마우이” 그 목소리에 힘이 없어 불안했다.

정말로 이것이 이번 생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됐다.

9일, 고인을 비롯한 화성연구회 회원들이 염원으로 중건 복원된 성신사 고유제가 끝난 후 나는 몇몇 회원들에게 선생의 근황을 전했다. 고인은 회원들이 걱정한다며 끝까지 자신의 건강상태를 감춰달라고 당부했지만 말이다

‘사람은 없고/하늘만 남아있다/주인 닮은 햇살 건공중에 가득하다/앞산 뒷산/새울음 풀벌레 소리만 보인다.’

지금 선생이 공들여 가꿨던 용인 이영미술관은 나의 시처럼 주인 닮은 햇살만 가득하다.

이제 내 주변엔 ‘어른’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 없다. 내 생애의 마지막 어른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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