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성(華城)의 축성 사업은 정조대왕의 면밀한 주도아래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던 세기적인 역사(役事)였다. 성역(城役) 사업 전체를 총괄하는 총리대신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성역 실무의 총책임자인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趙心泰)를 비롯해 도청(都廳) 이유경(李儒敬), 책응도청(策應都廳) 김노성(金魯成) 등이 당시 성역에 참여했던 주요 인물이다.

이때 수원에서 일찍부터 세거(世居)하던 토박이로서 화성성역에 가담해 별감동(別監董)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경기중군(京畿中軍) 김후(1751~1805)이다.

김후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 김상걸(金相傑 1727~1798)의 아들이다. 해풍은 풍덕(豊德)의 또다른 이름이며 경기도 개풍(開豊)의 옛 이름이다. 해풍김씨의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해풍(海豊)으로 하게 됐다.

해풍김씨는 고려시대부터 경기지방에서 무반(武班)의 지위를 굳혀왔으며 조선시대에도 그 전통을 면면히 지켜왔다. 조선초 함경북병사(咸鏡北兵使)를 지내며 맹위를 떨친 김수종(金壽宗)을 위시해 경상우도병사(慶尙右道兵使)로서 삼포왜변(三浦倭變 1510년)을 진압한 김석철(金錫哲)과 1588년(선조21) 여진족을 토벌한 북병사 김우추(金遇秋) 등이 해풍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후는 이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또한 선조의 무덤이 대대로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화성군(華城郡) 우정면(雨汀面) 일대를 어른들을 따라 성묘차 오고가며 훌륭했던 선조들의 모습을 그리며 자신도 그렇게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렇게 김후는 무반의 길을 꿈꾸며 자라다가 드디어 형인 김명과 함께 무과 급제하고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해풍김씨의 무풍(武風)을 조선의 만천하에 드날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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