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의 나라’ 조선은 새로운 사상과 신앙으로 급변하는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특히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외래 종교가 인천, 서울을 통해 들어와 수원을 거쳐 한반도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경기남부와 충청도를 잇는 근거지 역할을 담당한 곳이 수원이었다.

● 북수동 성당

북수동 천주교 성당은 1891년 왕림(갓등이) 본당의 공소로부터 출발하였다. 수원 남서쪽 30리 지점의 봉담읍 왕림리는 1839년 기해박해 이래로 신자들이 숨어 살기 시작하였다.  수원에서는 전국적인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 기유박해(1839) 때까지 공식적인 박해에 의한 순교자가 없다가 병인박해(1866) 이후로 순교자가 나와 수원 출신자 및 연고자를 포함하여 77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맺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합법화되면서 천주교는 박해의 대상에서 해방되었고, 산간벽지의 공소들이 본당으로 승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본당으로 승격한 것이 1888년 7월 설정된 왕림(갓등이) 본당이었다.

천주교도 처형의 집행장소였던 수원 성안의 미미했던 교세는 이곳에 공소가 생기면서 차츰 활기를 얻게 되었다. 1904년 성안의 유력한 인사들이었던 차재형·나기원·최동필·이규채 등이 나서서 왕림본당의 알릭스(J. Alix, 한약슬) 신부와 협의하여 남수리에 있는 황학정(黃鶴亭)의 정자와 대지 800평을 사들였다. 성안 일반인 유지들의 기부금으로 그곳에 25칸 짜리 한옥에 화양학교(華陽學敎)를 개설하고, 한편에 ‘천주당(天主堂)’ 간판을 걸고 일부를 공소 강당으로 사용하였다. 지금의 수원포교당 화광사가 위치한 곳이다.

남수리 황학정은 성당의 기능보다 화양학교의 기능이 보다 우월했다. 이에 알릭스 신부는 1906년 북수리에 있는 세칭 팔부자 거리의 기와집 두 채와 행랑채로 이루어진 번듯한 한옥을 사들였다. 대지 약 300평 규모의 한옥은 새로운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수원은 천주교 전교가 잘되지 않는 지역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천주교 박해 때 수원은 경기남부 지역의 천주교도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원의 주요 순교 현장으로는 재판이 이루어진 동헌인 화청관, 죄인들을 잡아 가둔 곳으로 6칸 초가 감옥인 현초옥, 형이 집행된 곳으로 군 사령부에 해당하는 중영(中營)이었다.

1932년 북수리 한옥을 헐고 75평 연와조 고딕식 성당을 준공하여 천주교 성당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수원교구는 2000년대 들어 북수동 성당 자리를 수원 순교성지로 선포하고 성지 전담신부를 발령하는 등 성역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1932년 연와조 고딕식으로 준공한 북수동성당.


● 수원종로교회

수원 지역에 개신교가 처음 유입된 것은 1893년(고종 30) 동탄면 장지리에 위치한 장지내 교회(현 장천교회)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1885년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온 감리교회는 1880년대는 인천과 서울을 근거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90년대는 평양, 원산과 함께 수원에 선교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원 성안에 자리 잡은 것은 1902년의 일이었다. 서울 이남의 선교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1901년 미북감리회 스크랜턴(Scranton) 선교사는 김동현(金東鉉)을 통해 화성 안에 가옥을 구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구입하려는 가옥이 화령전 북쪽으로 화령전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화성유수부는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이단의 교당을 짓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더욱이 김동현을 감옥에 가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당 거래를 되물리고 난 뒤 1901년 10월 김동현은 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화성부는 그 타협안으로 성안의 몇 군데를 추천하였고, 이에 수원·공주 순회구역장이었던 스웨어러(W. Swearer, 서원보)는 이명숙(李明淑)을 통해 북문 안 보시동의 13칸짜리 초가를 구입함으로써 성안 선교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02년 2월 17일 남자 3명과 여자 4명을 신자로 등록함으로써 수원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베크(Berk. S. A, 白瑞岩)의 도움으로 15명으로 매일학교를 개설하였다. 지금의 삼일학교와 매향학교의 시작이었다.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1908년 수원교회를 중심으로 ‘수원지방’이 조직되어 1912년에는 수원지역 뿐만 아니라 제천·음성을 포함한 충북지역과 여주·이천 등의 경기 동부, 그리고 남양·안산 등 경기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수원교회는 교세확장에 따라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였는데, 1913년에 함석지붕의 예배당 40평을 신축하였다. ‘수원종로교회’는 지금의 북수동 자리로 화성유수부의 군사적 근거지였던 중영(中營) 바로 옆이었다.

▲ 1909년 동신교회의 모습.

● 동신교회

화홍문 아래 수원천변으로 무형문화재 전수회관 옆에 위치한 동신교회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교회이다. 그럼에도 수원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기독동신회는 구약과 신약성서 이외에 특별히 믿는 것이 없으며 성서 그 자체를 믿으며, 교회제도는 필요 이상의 조직을 하지 않으며 목회제도가 없다. 행정상 필요한 임원을 선출하여 위임할 따름이다. 따라서 특별한 사제를 두지 않고 신자 모두가 사제로 계급의식이 없는 형제자매의 신앙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183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 플리머드 형제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플리머드 형제단 소속의 영국인 선교사 H.G 브랜드가 1888년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하자 이에 동참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가 한국에 전도하면서 비롯되었다.

▲ 동신교회를 설립한 노리마츠 마사야스 기념비.
그는 1900년 8월 9일 부인과 첫돌이 채 안된 아들을 안고 수원을 찾아왔다. 기독교 선교를 위한 것으로 일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 사례이다. 처음 1900년 9월 성안 북수동(장안동)에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수원에 영주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노리마츠를 특별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가 여타의 일본인과 다른 생각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타의 일본인들과 달리 한복을 입고 식기와 집도 한국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聖書講論所)’로 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1909년 8월 김태정(金泰貞)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水原聖書講堂)’이라 이름 붙였다. 1917년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였다.

1921년 노리마츠가 일본에서 죽었지만 그의 뼈는 이듬해 광교산 묘지에 묻혔고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동신교회 안에 서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었다.

● 영국성공회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영국성공회는 코르프(C. J. Corfe, 1865-1921, 高要翰) 초대 주교가 1890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 한국에 처음으로 성공회를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재직 중 마지막 사업으로 벌인 것이 서울·인천·강화 다음에 네 번째로 수원지방의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수원지역은 1904년 서울에서 파송된 송 전도사가 수원천 윗버드내(상유천)에서 전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수원군 안용면 장지리(현 공군비행장)에 최초의 성공회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1905년 초대 관할사제로 브라이들(Bridle, 부재열) 신부가 부임하면서 수원 매교동 가옥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1906년 현재 위치인 교동 11번지 일대 4,000여 평을 매입하면서 교동시대를 열었다. 매입한 땅에 철조망을 치고 전통 가옥을 성당으로 사용하였음을 1907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남녀 80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를 1908년 5월 16일 개교, 교육을 통한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1910년대 당시 교회 규모는 사제 2명, 전도사 7명, 신자 700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 성공회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1913년 서울에서 성 피득 보육원을 수원으로 이전하여 운영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한국성공회에서 유일하였던 성피득 보육원은 1898년 서울에서 설립되어 1913년 수원교회 안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1928년 9월 28일 진명학교는 진명유치원(進明幼稚園)으로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1943년 일제에 의하여 폐원되었다. 초창기 진명유치원 원장은 의사였던 신현익(申鉉益)이었다. 

▲ 영국성공회의 전경.


● 우리시대의 문화유산은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E. 와그너(Wagner) 여사는 ‘한국의 아동생활(Children of Korea)’(1911)이라는 책에서 “한국에서의 전도의 성공은 너무나 놀라워 그 업적은 전도의 기적이라 불리고 있다. 은자의 나라에 지금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형제 자매들이 2백만이 넘는다”라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기독교가 전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곳곳에는 초가집의 교회와 교회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천주교를 비롯한 개신교는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가 되었다.

수원에 있는 천주교 성당, 종로교회, 동신교회, 성공회 교당 등은 모두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해방 이후 새롭게 지은 건물들이다. 시멘트로 지은 그것들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100년 혹은 200년 뒤 우리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부족한 그리하여 안타까운 건물들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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