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케이블TV에서 비롯된 열기가 지상파TV로 옮겨가면서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이 요즘 주목받고 있다. 원조격인 ‘슈퍼스타K’는 아마추어들의 숨은 재능을 찾은 소박한 발상에서 시작했을 터이다. 한데 참가자들의 피나는 연습과정과 성패를 가르는 실연이 여과 없이 생생하게 방영되면서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곧 알게 됐다.

평소 미디어 제국을 자처하는 지상파에 눈길을 빼앗겼던 시청자들조차 케이블TV의 진가에 환호하면서 허각이란 비천한(?) 청년이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언론은 마침 불어 닥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신드롬에 편승, 환풍기 수리공 출신의 ‘슈스케 히어로’ 허각을 공정한 사회의 롤 모델로 치켜세웠다.

시청률 경쟁이라면 ‘막장드라마’도 서슴지 않은 지상파TV가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가 없다. 케이블TV와 거의 비슷한 포맷의 유사품이 지상파에 속속 등장했다. 어느 TV는 아마추어를 ‘기성품’(기성가수)의 실력대결로 급수를 높이더니, 자사의 아나운서 선발까지 이런 공개경쟁방식을 시도했다. 겨루는 영역도 대중가요에서 성악(오페라)으로 넓어져, 대중가수가 성악에 도전하는 프로그램도 생겼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이런 유사 프로그램의 범람을 보면서 미디어의 ‘냄비근성’이 또 도졌구나 싶기도 하고 얼마나 갈까 우려도 되지만, ‘우리’(제작자, 참가자, 시청자 모두) 내부에 똬리 틀고 있던 고정관념과 타성에 대한 각성제 구실을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자타가 인정하는 스타 김건모가 ‘나는 가수다’에서 속절없이 추락하는 것을 보면서, 매너리즘에 죽비를 가하는 시청자들의 싸늘한 경고음에 몸서리가 칠 정도였다.

경우에 따라서 어떤 참가자들(특히 기성 예술인들)에게는 잔혹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사회가 나름대로 건강하게 굴러가고 있으며, 그 건강도의 바로미터인 시민의식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내가 여전히 좋아하는 김건모는 이번을 계기로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더 큰 가수로 우뚝 서리라 의심치 않는다.

이번 김건모의 예에서처럼 ‘공개경쟁’은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대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가급적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 들지 공개의 장에 거듭 노출되길 꺼린다. 한번 검증된 사안(인물)이라도 시간이 흘러 다시 오픈되는 것은 심적으로 켕기는 일이다. TV의 공개 오디션(경쟁) 프로그램은 이런 속성에 관한 역설적인 성공사례로 평가한다.

한데 최근의 이런 사회 현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문화예술계는 공개경쟁의 무풍지대에 여전히 안주하는 것 같다. 특히 일부 국공립 예술단체를 중심으로 공개경쟁을 노골적으로 꺼리는 ‘집단주의’의 위세가 만만찮다. 소위 오디션에 대한 알레르기성 거부감이다. 이런 단체의 단원들은 오디션의 ‘오’자만 꺼내도 그것을 신분의 위협으로 느끼며 결사항전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일반적으로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오디션은 제작하는 작품의 배역에 맞는 마땅한 인물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단원 신분의 지속성 여부를 판단하는 ‘계약오디션’ 등 여러 유형이 가능하다. 이 배경에는 경쟁을 통한 분발과 자극이라는 전제가 깔렸지만, 사실 작품의 질을 좌우하는 가장 기초 시발점이 바로 오디션이다. 한데 이런 상식이 견고한 단원의 서열 구조 앞에서 무력화하기 일쑤이고, 있어도 요식행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다행히 이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문화부는 최근 오디션 제도의 보완을 통한 국공립단체의 역동성을 주문하고 나섰다.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TV를 통해 모처럼 확산한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 사례가 ‘순수’문화예술계에도 제대로 이식된다면 제2, 제3의 허각 같은 인물이 이 분야에서도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 청량제 같은 소식이 자꾸 날아들 때 문화예술의 질적인 완성도도 한 차원 높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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