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화성연구회는 1년에 세 번 정기답사를 실시한다. 두 번은 국내, 한번은 해외에서 성곽 등 역사유적지를 방문한다.

그런데 2019년 여름 우즈베키스탄을 마지막으로 답사는 중단됐다. 코로나19 확산 때문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답사여행은 이번 봄에 다시 시작됐다. 지난 8일과 9일 창녕과 창원일대에서 화성연구회의 1박2일 답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포늪을 거쳐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 교동 고분군과 관룡사를 본 후 창원으로 가서 이원수문학관과 김달진 문학관을 관람했다. 수원으로 돌아오는 길엔 케이블카를 이용해 대구 팔공산 소원바위까지 올랐다.

우포늪과 경남지역의 가야 고분군은 나의 국내여행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곳이고 이원수문학관은 수원과의 인연이 있어서 언젠가는 꼭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원수문학관은 문이 닫혀있었다. 일요일과 공휴일, 월요일은 쉰단다. 내가 아는 박물관, 미술관, 문학관들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휴관하지 않는다. 그날은 더 많은 관람객들이 오기 때문이다.

이원수문학관에 전시된 그림. 아마도 서울 간 오빠를 기다리는 최순애와 모친이 아닐까.
이원수문학관에 전시된 그림. 아마도 서울 간 오빠를 기다리는 최순애와 모친이 아닐까.

숨을 헐떡거리며 높은 언덕길을 오른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일요일과 공휴일 휴관은 창원시가 반드시 재고해야 할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할 수없이 다시 언덕길을 터덜터덜 걸어 내려와 김달진문학관에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이원수문학관. (사진=필자 김우영)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이원수문학관. (사진=필자 김우영)

이원수의 아내는 수원사람 최순애다.

최순애는 ‘오빠 생각’이라는 국민동요 노랫말을 지은 이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 시는 1925년 소파 방정환이 발행하던 잡지 ‘어린이’ 지면에 실렸다. 이 시를 지을 때 최순애는 12살이었다. 이 시에 작곡가 박태준이 곡이 붙였다. 1926년 16세 소년 이원수의 첫 발표작인 ‘고향의 봄’이 같은 잡지에 게재됐고 홍난파가 곡을 붙였다. ‘오빠생각’과 ‘고향의 봄’은 ‘국민동요’가 됐다.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부부가 됐다.

이원수는 최순애와의 인연을 ‘뿌리깊은 나무’ 1980년 11월호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 전해에 이 잡지에 수원에서 사는 최순애라는 여자가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 생각’이라는 동시를 발표했었다. 나는 그 동시가 무척 좋아 내가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것을 핑계로 편지를 썼더니 답장이 왔다. 이때부터 나와 최순애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중락)…이렇게 계속해서 편지로만 사귀어 오다가 일천구백삼십오년에 드디어 우리는 수원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사진으로 얼굴을 익히고는 있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던 나는 이러이러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수원역에 내리면 바로 난 줄 알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에 나는 검거되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지게 된 것이었다. 예심이 끝난 가을에야 겨우 편지를 낼 수 있었고, 그제서야 최순애의 편지를 받았다.

‘…잡혀가셨더라도 곧 나오시려니 했는데 봄이 되어도 아니 오시고 여름이 되어도 소식조차 알 길이 없었어요. 뒷동산과 집 주위에 코스모스도 다 지고, 지금은 찬바람에 눈이 옵니다.’ 그래도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일천구백삼십육년 일월 삼십일에 풀려나서 마산으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실직자요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한 해 동안 나를 기다려 준 최순애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원으로 갔다. 그때 들었지만 그와 만나기로 했다가 내가 잡힌 그날에 지금은 내 아내가 된 최순애 대신에 수원역에서 나를 기다리던 장인은 내가 끝내 오지 않자 화를 내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더욱이 내가 ‘사상범’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로 옥에 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의 집안은 발칵 뒤집혀졌다고 했다. 아무튼 내가 수원에 간 것은 환상 속의 세계가 현실 세계로 펼쳐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아내의 집에서는 내 전과를 내세워 혼인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 우리 편에 서서 도와 준 사람은 그의 오빠 최영주였다. 최영주는 방정환 선생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개벽’, ‘신여성’ 같은 방정환 선생이 편집을 맡았던 잡지사에서도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가 편을 들어 주어 아내의 집에서 간신히 허락을 받아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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