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10월31일, 반가운 손님들을 만났다. 최순애-이원수의 딸인 이영옥(1941년생, 오산시 거주)과 이정옥(1945년생, 군포시 거주)이었다. 내가 아끼는 후배 역사학자인 현 수원화성박물관장 한동민과 현 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연구센터장 유현희로부터 두 사람과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면서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녀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싶었던 터였다.

그날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열린 ‘수원지역 근대문화예술인들의 삶과 활동’이란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최순애와 관련된 내용이 발표되는 자리여서 두 딸도 초청을 받은 것이다.

최순애-이원수 부부의 딸들, 이영옥(오른쪽)과 이정옥. (사진=2013년 필자 찍음)
최순애-이원수 부부의 딸들, 이영옥(오른쪽)과 이정옥. (사진=2013년 필자 찍음)

나는 그때 자매와 나눈 이야기를 한 매체에 소개했다.

“저의 아버지(이원수)가 어머니께 엄청 오랫동안 구애를 하셨나봐요. 어머니 집안에서 반대가 있었는데 결국 외삼촌(최영주) 등이 도와서 혼인이 성사된 것 같아요”

“첫 만남은 수원역에서 갖기로 했대요.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손에 무엇을 들고 기다리겠다고 편지로 약속을 했는데 아버지가 ‘함안독서회 사건’으로 왜경에 체포 되는 바람에 첫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답니다"

“혼인식은 수원 어머니 집에서 했어요. 그런데 혼인식을 마치고 경상남도 시골 아버지 집으로 가보니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더래요. 쌀항아리가 겨우 물동이만하고 살림살이도 거의 없어서 소꿉장난하는 기분이었답니다”

“어머니가 고생 참 많으셨어요. 서울로 이사 온 후에도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질 않아서 어려움을 겪으셨어요”

자매는 이런 얘기를 하면서도 시종 유쾌했다. 아내에게 돈을 잘 벌어다주지 못하는 아버지 이원수를 주변에서 ‘이 웬수’라고 놀렸다는 말까지 했다.

이처럼 혼인까지 이어지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혼인 후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자매들의 증언처럼 “살림살이도 거의 없고 쌀 항아리가 겨우 물동이만 했다”니 가난한 형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난뱅이에다가 사상범이기까지 했으니 어느 부모인들 이 혼인을 찬성했겠는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혼인이 성사된 것은 오빠 최영주(본명 최신복)의 도움이 컸다.

당시 일류 편집자이자 출판인으로서 일제강점기에 출판을 통한 아동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잡지 ‘박문’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그는 수원에서 화성소년회를 조직하고, 잡지 ‘학생’을 발행하는 등 소년운동을 전개했다. 소파 방정환이 조직한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 ‘색동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최순애의 ‘오빠 생각’은 최영주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동시였다.

최순애는 수원면 북수리(현 수원시 북수동)에서 태어나 혼인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오빠 최영주는 9살 위로 수필과 동요 동시 등을 발표한 문인이기도 했다. 최순애의 여동생 최영애도 10살 나이로 어린이 잡지에 동시 ‘꼬부랑할머니’가 실렸으니 문재(文才)가 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원수와 최영주는 친일 인사로 분류돼 있다. 이원수는 1942년 이후 ‘지원병을 보내며’ 등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썼다. 그럼에도 2003년 경남 창원시는 ‘고향의 봄 도서관’과 이원수 문학관을 건립했다. 문학관에는 그의 삶과 문학은 물론 친일 행적도 함께 전시돼 있다. 그리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원수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둘째딸 이정옥이 2011년 11월 창원시 성산아트홀에서 열린 이원수 탄생 100돌 기념행사에 참석해 “나름대로 아버지를 존경하던 분들이 굉장히 상처 입고 배신감도 느끼신 걸 이해하고, 모든 분들에게 정말 죄송하기만 하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한다”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겨레신문도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의 자손이 대신해서 그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공개 사과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보도했다.

오빠 최영주는 월간잡지 ‘신시대’ 주간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황민화' 정책,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찬양하는 등의 글과 사진 등을 게재해 친일파로 분류됐다.

이번 답사 여행의 안내를 맡은 한동민(화성연구회 부이사장, 수원화성박물관장)은 최순애문학비가 건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남편인 이원수와 오빠인 최영주의 친일문제가 있지만 최순애는 친일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오빠생각’의 ‘오빠’가 친일인사인 최영주라지만 당시 12살인 최순애 작품 속의 오빠는 그냥 보고픈 가족이었다. 당시 최영주는 친일파가 아니라 아동운동가였다. 이 작품에 친일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된다. ‘오빠’는 우리 마음속의 그 오빠일 뿐이다.

팔달산 기슭의 ‘고향의 봄’ 노래비처럼 최순애의 ‘오빠생각’ 동요비, 또는 문학비가 건립되면 좋겠는 주장에 동의한다.

1978년 수원 화성 장안문 앞에 선 최순애‧이원수 부부. (사진=이원수문학관 홈폐이지 캡처)
1978년 수원 화성 장안문 앞에 선 최순애‧이원수 부부. (사진=이원수문학관 홈폐이지 캡처)

5년 전 나는 한 칼럼에 “팔달산에 이원수와 홍난파가 글을 짓고 곡을 만든 노래비가 있으므로 이 부근이나 최순애의 출생지인 북수동에 최순애 ‘오빠생각 문학비’를 세우면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라고 썼다. ‘오빠생각’ 최순애와 ‘고향의 봄’ 이원수의 만남도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명소가 탄생할 수도 있다.

끝까지 지조를 지켰어야 했는데 버티지 못하고 일제 말기에 친일의 길을 걸었던 이원수와 최영주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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