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뒤에 청나라군이 금주를 포위했다. 명나라는 10만 대군을 보내 청나라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했다. 유 장군은 영철을 보내 청태종 홍타시에게 승전을 축하하는 인사를 전했다. 아라나는 또 다시 이 자리에서 앞서 있었던 영철의 잘못들을 아뢰면서 죄주기를 청했다. 이에 청태종은 손을 들어 남쪽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철은 본래 조선인이다. 지난 세월중에 8년 동안은 우리 백성으로 살았고, 6년은 등주에서 살았다. 지금은 돌아가 조선 백성이 됐다. 조선 백성 또한 우리 백성이다. 더구나 그의 장남은 우리 군중에 있고, 차남은 건주에 있으니 부자가 모두 우리 백성이 됐다. 그렇다면 저 등주 사람인들 우리 백성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천하를 얻는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됐으니, 이 사람이 온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청태종은 영철에게 비단 10필과 오랑캐 말 한 필을 하사했다. 영철은 이에 사은숙배하며 "원컨대 이 말을 아라나에게 주어 제 목숨을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고 그의 말을 훔쳐간 죄를 대속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청태종은 이에 "영철은 잘못을 알고 은혜를 잊지 않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고 흐뭇해하며 영철의 말을 좇아 자신이 하사했던 말을 아라나에게 주고 영철에겐 청노새 한 마리를 따로 내려줬다. 영철은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을 득북에게 건네주며 "돌아가거든 이 말을 득건에게 전해주라."고 했다.

몇 달 뒤 임무를 교대하는 조선군이 도착하자 영철은 봉황성으로 돌아갔다. 유 장군이 영철에게 귀뜸해줬다. "금주에서 너를 위해 대속한 남초는 호조의 군수물자다. 네가 갚아야 하느니라."

​영철이 집으로 돌아온 지 수개월 만에 호조가 관향사에게 서찰을 보내 영철이 은 2백냥을 갚도록 하라고 독촉했다. 영철은 청노새를 팔고 값나가는 집안 세간살이도 죄다 내다 팔아 간신히 그 절반은 갚았다. 나머지는 마련할 길이 없었으나 친족들이 힘써 도와준 덕분에 그 수량을 채울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들은 이웃들은 영철의 사정을 참 딱하게 여겼다.

앞서 영철의 부친은 정묘호란 때 안주성전투에서 전사한 바 있다. 영철의 어머니는 당시 옷으로 초혼하고 그 옷을 남겨두었다. 영철이 돌아온 뒤 어머니와 함께 그 옷을 가지고 안주로 갔다. 성에 올라 사방을 돌며 울부짖고 통곡하면서 아버지의 혼을 불렀다. 이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 죽거든 반드시 이 옷도 함께 묻어다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말씀대로 이 옷도 함께 묻었다.

​영철은 조선으로 돌아와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의상(宜尙), 득상(得尙), 득발(得發), 기발(起發)이 그들이다. 영철은 언제나 종군했던 시절이 가장 고생이 심했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식들 또한 그렇게 될까 걱정했다. 무술년(1658.효종9년) 조정에서는 평양 근처의 자모(慈母)산성의 중수(重修)를 명하면서 이 성을 지킬 군사들을 모집했다. 선발된 군사들에게는 군역을 면제해줬다. 영철은 이 때 네 아들과 합께 성 안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미 60여 세의 노인이었다. 무료한 가운데서도 마음 한 구석은 휑한 날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성에 올라 으레 북쪽으로 건주(만주)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등주쪽을 응시했다. 남모를 슬픔과 아득한 그리움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흥건하게 적셨다.

​영철은 때때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처자식은 나를 버린 적이 없는데도 내가 실제 그들을 버려 두 곳(건주와 등주)의 처자식들에게 평생토록 슬픔과 한을 남겨줬으니, 지금 나의 곤궁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어찌 재앙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 자신이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있다가 끝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왔으니 어찌 이를 한하겠는가."

영철은 20여 년간 자모산성을 지키다가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모질고 한많은 인생이었다.

​이 글의 저자인 조선 후기 중인 출신의 문장가 유하(柳下) 홍세태는 외사씨(外史氏.역사를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빌어 통렬한 어조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을 모른체하는 조정의 야박한 처사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영철은 출정군으로 참전했다가 붙잡혀 오랑캐의 포로가 됐고, 끝내 숱한 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쳤다. 처자가 있음에도 모두 포기하고 돌아보지 않은 채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그 뜻이 얼마나 가상하고 장렬한가. 그 일 또한 기특하다고 이를 만하다. 가도(椵島) 군역(軍役)의 경우, 심한 고생을 마다않고 큰 공을 세웠음에도 작은 포상도 없었다. 현령은 말값을 받아갔고, 호조는 또 남초값인 은 200냥을 독촉, 환수했다. 어디 이 뿐인가. 60세가 한참 지나서까지 성을 지키는 수졸로 부리며 곤궁하고 우울하게 살다가 죽게 했으니, 이러고도 어떻게 천하의 뜻있는 선비들에게 충성을 권면하겠는가. 나는 이 사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묻힐 것을 슬퍼하여 이 전(傳)을 써서 후인들에게 보여줘 조선에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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