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토요일 오후에는 지인 분의 아들이 결혼하여 그 예식장에 갔다. 이제 화제가 되지 않겠지만 양가의 아버지들이 주례 대신 나서서 소통과 배려를 위주로 신랑 신부에게 덕담을 하였다. 그렇다 드디어 슬하를 떠나 자립하는 자식, 행복을 축원하는 그 메시지가 아무리 우악(優渥)하였어도 그 심정의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표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랑과 신부가 생애 최고로 경신된 의지로 그 덕담과 기대를 진정 뼈와 마음에 새겼다고 하더라도, 다 아는 대로 대체로 결혼 생활에는 작고 큰 일탈과 유감도 점철된다. 이혼과 졸혼이 우리의 사전에 없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결혼한 이상, 두 사람이 그 어떤 갈등과 문제에도 책임져야해 결혼의 첫 장에서부터 두루 잘 각오해야 하겠지만, 차라리 다음과 같은 시를 한번 읽는 것도 신랑과 신부에게 뜻있지 않을까. 그러자고 선뜻 내켜할 하객이 거의 없을 테지만 말이다. 미리 말해 다음 시는 신혼 시절이 아니라 중년 이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결혼 생활도 대개 첫 서너 해에 속성이 형성되고 지속되기 쉽다.   

 

아내에게는 젊고 다정한 연인이 필요했고

나는 더 깊은 가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내의 어깨는 발효빵처럼

점점 둥글게 부풀어 오르고

나는 밀실에서 다만

곡선처럼 선량하고 싶었다.

 

의자에 앉아 깍지를 끼고 눈을 감으면

아내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닌

이명 같은 죄가 전주도 없이 흘러나왔다.

 

고분고분하게 시들어 가는 것이 나은 것인가.

아내가 베란다에서 키우는 베고니아처럼.

 

침묵을 배양하는 데 익숙해지면

육체와 녹슨 관의 차이를 알기 힘들어진다

다만 눈물을 흉곽 안으로 삼키면

검고 거대한 싱크홀이 생길 뿐

 

아내가 잘라 낸

시든 베고니아 잎에는

희디흰 곰팡이가

개양귀비꽃보다

아름답게 번지고 있었다. 

                           - 「평화로움을 위한 후주」/정창준

 

 어쩌면 흔하다고 할 부부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그 수위는 보통 이상이다. ‘아내에게는 젊고 다정한 연인이 필요했고’라 해서 좀 당황하였지만, ‘나는 더 깊은 가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하 화자의 토로에서 알 수 있듯 이 부부의 갈등은 아내와 남편이 서로 바라는 바가 달라서 발생하였다. 아내는 남편의 애정 표출이 계속 ‘여름’이기를 요구하지만, 남편인 화자는 ‘가을’, 그것도 ‘더 깊은 가을’로 수축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내의 어깨는 발효빵처럼/점점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는 묘사는 아내의 그 관련된 활기로 이해하겠는데, ‘나는 밀실에서 다만/곡선처럼 선량하고 싶었다’는 대응이라 하기에 어색하다. ‘밀실’ ‘곡선’ 운운은 양해할 수 있겠는데, 글쎄 ‘선량하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아내의 그 팽창을 소극 태도로 방관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이 시가 여성이 중년에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하고 남성은 감소한다는 사실에만 관련되지 않고, 자칫하면 무슨 선(善)과 악(惡)으로 대비될 ‘선과 비선(非善)’을 부각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진다. 하지만 그 심화에 해당하는 2연의 ‘아내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닌/이명 같은 죄’에서 우리는 오히려, 부부의 갈등이 두 사람 자신의 어떤 욕망이나 지취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방식과 외부 상황에서 더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며, 또 ‘죄’는 바로 죄가 아니라 어떤 오류와 미흡을 자인하고 몹시 후회하는 감상(感傷) 심정의 표현으로 정리할 수 있고, 외부 상황도 외부 상황이지만 전자 관계방식에 그 비중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소극을 이어 토로하지만 결국 추인하거나 방기하지 않는다. 4, 5연에서 우리가 살필 수 있듯, ‘고분고분하게 시들어 가는 것이 나은 것인가’라고 회의하면서도, 계속 침묵하면 자신이 ‘녹슨 관’과 다를 바 없고, 가슴에 메우기 어려운 ‘싱크홀’이 생길 것이라고 자신에게 경고한다. 그러고 보니 1연에서도 ’곡선처럼 선량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러고 싶었다는 것이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즉 모두 원망(願望)이며 미수(未遂). 또한 우리는 마지막 연에서 화자가 ‘아내가 잘라 낸 시든 베고니아 잎’의 ‘희디흰 곰팡이’ 무늬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개양귀비꽃보다 아름답게 번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의자에 앉아 깍지를 끼고 눈을 감’은 위 묵상처럼 침착하고 사려 깊은 자제의 변증 자기성찰일 뿐만 아니라, 이 회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이후 현재 작중 부부의 관계를 이 시의 제목 ‘평화로움을 위한 후주(後註)’와 더불어 유추하게 한다. 화평에 이른 과정에서 부부가 새삼 나눈 인지상정은 아무래도 역시 소통과 배려였겠지.  

사족 : 이 시를 읽고 나서, ‘아내’를 ‘남편’으로 바꿔 읽어도 좋을 것이다. 시인이 미소 지으며 두 손 들어 허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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