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세월이 지나 1973년이 되니 나라 사정이 날로 어지러워졌습니다.

72년 가을에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발표하고 드디어 74년 1월 8일에는 그 헌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거나 반대 집회를 하는 자는 최고 사형 선고까지 하겠다는 긴급조치 1호가 공포되었습니다.

난 빈민 선교에 학생으로 수업에 참여하느라 밖의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지만 유신헌법의 발표를 듣고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아니지. 박 대통령이 안보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것도 좋지만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유신헌법 발표에도 시민들과 학생들이 여전히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지니 1974년 1월 8일에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었습니다.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발표를 하거나 시위하는 자들은 사형에까지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이건 너무하다. 민주주의는 반대할 권리도 있어야지 반대한다고 사형까지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터에 성남에서 일하는 이해학 목사가 찾아 왔습니다.

둘이서 유신헌법에 대하여 그리고 긴급조치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이럴 때는 우리 같은 성직자들이 나서야 한다. 사형까지 하겠다는데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들 성직자들은 어차피 옳은 일에 생명까지 걸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우리가 나서자."

이해학 목사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동지들을 모아 유신헌법 폐지, 긴급조치 반대 종교인들 33 명을 모아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긴급조치에 반대하자는 시위를 벌이자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둘이서 역할을 나누어 기독교 목회자들, 가톨릭 신부님들, 불교의 스님들을 접촉하여 33 명의 성직자들을 모아 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습니다.

다음 날부터 둘이서 열심히 다녔으나 신부님들도 스님들도 뜻에는 공감하지만 나서지는 않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개신교 목회자들만으로라도 행동하자 하여 13 명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행동하는 날로 1974년 1월 17일 오후 3시로 정하였습니다. 1월 8일에 긴급조치 제1호가 발표된 지 9일 후였습니다.

우리는 흰 천에 붉은 글씨로 다음 같이 써서 내걸고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앞에서 시위에 들어갔습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자유 민주주의 회복하라"  "군사 정부 물러가라"

지나가던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격려하는 말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의기양양하여 구호를 외치고 등사하여 간 성명서를 뿌리기를 반시간 쯤 지나자 험한 인상의 남자들이 들이닥치더니 우리 일행을 멱살잡이하여 끌어갔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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