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신문에서 이런 시를 보았다.

세상이 거친 바다라도/그 위에 비치는 별이 떠 있느니라/까불리는 조각배 같은 내 마음아/너는 거기서도 눈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역사가 썩어진 흙탕이라도/그 밑에 기름진 맛이 들었느니라/뒹구는 한 떨기 꽃 같은 내 마음아/너는 거기서도 뿌리박길 잊지 마라//인생이 가시밭이라도/그 속에 으늑한 구석이 있느니라/쫓겨가는 참새 같은 내 마음아/너는 거기서도 사랑의 보금자리 짓기를 잊지 마라

내 마음 속 스승 중 한사람인 함석헌 선생의 ‘마음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다. 노래로도 작곡돼 불려졌다. 참으로 금이야 옥이야 귀중히 받들어야 할 말씀이다.

삶이 봄풀의 꿈이라도/그 끝에 맑은 구슬이 맺히느니라/지나가는 나비 같은 내 마음아/너는 거기서도 영원히 향기 마시기를 잊지 마라

수원천을 걸으며 이 시의 마지막 연을 가만히 읊조려본다. 아하, 어느덧 환갑진갑 지나 60중반인 내 가슴을 울린다. 그러고 보니 지나온 내 생애는 봄풀과 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제는 삶이 봄풀의 꿈이란 것만은 알겠다. 그 풀끝에 맑은 구슬과 같은 물방울이 맺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나비인 것이 틀림없다. 나비처럼 날지는 못하지만 틈만 나면 영원한 향기를 마시기 위해 길을 걷는다.

수원천에 핀 꽃. (사진=김우영 필자)
수원천에 핀 꽃. (사진=김우영 필자)

전에는 산에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젠 내려오는 길이 어렵다. 70넘은 형님들이 들으시면 “예끼~”하시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얘기다. 높은 곳을 올려다보지 말라는 하늘의 말씀이라고 내 멋대로 이해한다. 그래서 평지를 걷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는 △화성 성곽 일주 △팔달산 둘레 일주 △수원천 △광교산 저수지 둘레 △광교산 종점길 △원천리천 △칠보산 △화성성내 전통시장과 행궁동 마을 골목 △행궁광장부터 수원역까지의 옛길 △옛 원천저수지(광교호수) 둘레길 등이다.

특히 화성성곽과 팔달산을 한 바퀴 돌고 팔달문 시장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순하다. 요즘 같은 날 땀을 흠뻑 쏟고 나면 막걸리 한잔이 생각난다. 자주 가던 지동의 안성순대가 문을 닫고 나서는 갈 곳이 없어졌는데 다행히 공예가 ㄱ이 옛 중앙극장 골목에 밥집을 차렸다. 5500원에 정갈한 집 밥 한상을 내준다. 술집은 아니지만 밥을 시키고 막걸리를 반주(내겐 이게 메인이다)로 시킨다.

수원천은 종로부터 비행장 담장 있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왕복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물과 풀, 꽃, 나무, 물고기, 오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무엇보다 자동차도 없고 신호등이 없어 쉬지 않고 걸을 수 있다.

광교저수지 둘레길은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산과 나무와 꽃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한 쪽 길은 걷기 좋은 나무 데크로 돼 있고 벚꽃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다. 반대쪽은 산길이지만 호수를 끼고 있는데다 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절경이 등장한다.

데크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광교산 버스 종점길이다. 수원천의 상류인 맑은 광교천을 끼고 가는 길인데 나는 하천 건너 흙길이 좋다. 오래전 걷던 시골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오가다가 출출할 때 곳곳에 있는 보리밥집에 들르는 것 또한 즐거움 중의 하나다.

원천리천은 수원천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서 또 걷는 맛이 난다. 여름엔 하수구 악취가 나는 구간도 있지만 하류 쪽으로 갈수록 별유천지(別有天地)가 펼쳐진다. 풀벌레 소리밖엔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명상과 같은 산책을 할 수 있다.

원천리천 모습. (사진=김우영 필자)
원천리천 모습. (사진=김우영 필자)

내가 있는 곳에서 좀 멀긴 하지만 옛 원천저수지 둘레길도 걷기명소가 됐다. 지금은 광교호수라고 불리는데 수원에 오래 산 사람들에겐 낯설다. 광교신도시라는 이름도 그렇다. ‘원천’, ‘먼내’, ‘머내’ 등 이 좋은 이름들을 두고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동네 이름을 빼앗아 쓰는지.

수원시도 걷기 좋은 길이라면서 ‘팔색길’을 홍보하고 있다. △모수길 △지게길 △매실길 △여우길 △도란길 △수원둘레길 △효행길 △화성성곽길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듣고 감이 잡히는 길은 수원둘레길, 효행길, 화성성곽길 뿐이다.

뿐만 아니라 걷다 보면 왜 이 길이 팔색길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구간이 많다. 자동차들의 질주와 매연 소음 등으로 걷고 싶지 않은 길도 적지 않다. 어떤 길은 찾아가기도 힘들다.

어찌됐거나 선택은 걷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벗님들, 가을장마 걷히거든 우연을 가장해 길에서라도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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