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을 올해 반드시 가자고 한다. 동생들이.

당연히 몸이 근질거린다. 여행은 중독성이 있어서 하늘에 떠가는 비행기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 그런 걸 무려 3년 동안 못했으니...

경제사정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그러자고 맞장구쳤다. 어머니 제사. 그날.

일본에 사업 연고가 있는 동생이 도쿄에 가자면서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일본은 싫다고 했다. 역사왜곡에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고, 일본군 강제 위안부와 강제 징용노동자들을 외면하는 저들의 행태에 화가 났다.

“지사·의사·열사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지만, 그들은 물론 그분들 후손들까지 가난과 고통, 탄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온 세월이 얼마이던가요. 반대로 그들을 해치고, 그들을 밀고하고 탄압하던 일에 앞장서서 일본에 부역하고 친일한 사람들만 부귀호강을 누렸고, 또 그들의 후예들만 잘 먹고 잘 살던 세월은 얼마였던가요.”

몇 해 전 3.1절 무렵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포럼 칼럼을 통해 이렇게 한탄했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점이며 그들의 후손들이 아직도 주류사회의 일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친일파를 청산하고 그 잔재를 깨끗이 씻어내는 국민과 국가적 노력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내 생각도 그와 같다.

지난 24일 수원광교박물관에서 수원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난 이재준 수원특례시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철학과 정신을 알려야 합니다.” 참고로 이 시장은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1870~1917)의 후손이라고 한다.

가만, 그러고 보니 왜정시대 필자의 강릉 김가 몇 대 할아버지들도 평안북도 선천 태화동에서 만주로 도망갔다던데...아버지는 서학, 동학, 일본놈들은 다 싫다고 하셨다. 그 이 김기옥, 내 아버지는 제발 야당 하면 안된다고 하셨다. 당신은 벽장에 ‘사상계’ ‘현대문학’을 놓아두어서 아들을 시인과 기자 만들어 놓았으면서. 손녀는 서학 수녀 만들어 놓았으면서. 으허허.

윤봉길 의사(1908~1932)를 기리는 ‘매헌의 꿈, 시에 담다’ 순회전시회에는 수원의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1874~1930)의 후손 임병무 시인도 수원시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임병무 시인은 나와 오랜 교유를 나누고 있는데 최근엔 좀 뜸해졌다. 그는 아프다. 나도 나이 들었다. 그는 할아버지 임면수 선생을 꼭 빼닮았다.

30여 년 전 첫 시집을 준비하는 임병무시인을 처음 만났다. 시집의 작품해설을 써준 인연은 오래 갔다. 인성은 몹시 착했지만 그만큼 가난했다. 그럼에도 아끼지 않고 술값을 냈다.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재산을 내어준 것처럼.

어느 날 갑작스럽게 쓰러져 뇌수술을 받았다. 후유증으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생활전선에 나섰다. 식당일, 보험설계사, 요양보호사를 하다가 작년부턴가 정자동 어디에서 복권판매소를 하고 있다는데 아직 가본 적이 없다. 근일내로 산책삼아 가봐야겠다.

지난 2015년 광복70주년을 맞아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 제막식. 필동선생의 친손자인 임병무 시인(동상 왼쪽)과 부인(동상 오른쪽).
지난 2015년 광복70주년을 맞아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 제막식. 필동선생의 친손자인 임병무 시인(동상 왼쪽)과 부인(동상 오른쪽).

임면수 선생의 동상은 시청 앞 올림픽 공원에 있다. 2015년 2월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됐고, 학술 세미나가 그해 7월 1일 수원문화재단에서 개최됐다. 8월 15일엔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 선생의 동상을 건립했다.

임면수 선생.
임면수 선생.

임면수 선생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젖먹이가 포함된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통화현 합니하에 개교한 제2의 신흥무관학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무장 결사대의 일원으로 현장에서 활동했다. 일제에 의해 체포된 이후 고문을 당했다. 1930년 12월 숨을 거뒀다.

독립군자금을 운반하던 큰 아들 임우상 지사도 국내의 군자금을 만주로 운반하던 중 혹독한 추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독립군의 어머니’ 전현석 선생.
‘독립군의 어머니’ 전현석 선생.

부인 전현석 선생은 더욱 존경스럽다. 만주에서 객주업을 하며 매일 갓 지은 따듯한 밥을 춥고 허기진 독립군들에게 먹였다. 몇 달 묵은 냄새나고 색 바랜 빨래도 해줬다. 그 어른은 독립운동의 어머니였다.

임면수선생 일족을 ‘위대한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조국 독립을 위해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임면수선생에게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고, 삼일학교 교정에 있던 묘소는 국립 현충원으로 이장됐다. 그러나 부인 전현석 여사와 아들 임우상 지사는 아직까지 정부의 표창이나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임면수 선생 손자 임병무 시인이 하는 복권방이 잘 되길 기원한다. 그래서 집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행복하게 살라! 가난과 고통이 대물림되는 독립지사 후손들의 삶에서 벗어나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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