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대 성조도 위부분. 팔달산 정상에 있는 화성장대에서 야간훈련을 하고 있다. 이날 3700여명이 훈련에 참여했다. (자료=수원시)
서장대 성조도 위부분. 팔달산 정상에 있는 화성장대에서 야간훈련을 하고 있다. 이날 3700여명이 훈련에 참여했다. (자료=수원시)

화성행차 셋째 날(윤2월 11일) 예정된 행사는, 첫 번째로 새벽에 수원향교 대성전에 참배하고, 두 번째는 문무과 별시를 치르는 행사였다. 세 번째는 진찬연 예행연습을 거행했다.

넷째 날(윤2월 12일)의 행사는, 오전에는 현륭원을 참배하고, 오후에는 주간 군사훈련, 밤에는 야간 군사훈련이 실시됐다.

알성도. 수원향교 대성전에 참배하는 모습. 능행도 8폭병풍에 수록돼 있다. (자료=수원시)
알성도. 수원향교 대성전에 참배하는 모습. 능행도 8폭병풍에 수록돼 있다. (자료=수원시)

윤2월 11일은 행차 3일째로 화성에서의 첫날이다. 

정조는 화성에서 첫 번째 행사로 향교 대성전 참배 했다.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는 유학진흥의 뜻을 가지고 찾았다. 대성전에는 공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에서 박세채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 참배는 아침 묘시(5~7시)에 실시됐다. 정조는 행궁을 나오면서 동부승지 이조원에게 향교에 다녀온 후 실시예정인 문무과 별시에 대해 준비사항을 지시했다. 

정조는 향교에 이르러 예를 올린 후 내부를 살펴보고 ‘집이 이렇게 낡고, 단청이 헐고, 의자와 상탁, 포진(깔개), 노합(향로) 등이 모두 제 꼴이 아니다. 전부 수리하라,’고 일렀다.

정조는 그곳에 있는 유생들에게 물었다. “오늘 정시(庭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과거)에 그대들은 응시했는가. 아니면 입적(入籍, 호적에 올림)은 했으되 준식(準式,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다른 지방에서 왔는가.” 하자 행우승지 이익운이 “뜰에 있는 사람이 모두 36인으로, 그 중 두 사람은 용인에 살고, 나머지는 화성부에 살고 있는데, 축실년(築室年, 집을 지은 해)이 낮아서 응시를 하지 못했습니다” 라고 답변했다.

정조는 “이 지방이든 다른 지방이든, 적(籍)이 있든 없든, 모두 거안(擧案, 명함을 올리는 일)을 받들어 응시케 하라. 그리고 봉투 안에 ‘성묘집사생(향교에서 일을 본사람)’이라고 쓰라.”고 지시하여 이들에게도 응시기회를 주었다.

정조는 말을 타고 행궁으로 돌아와서 낙남헌에서 진시(辰時, 7~9시)에 실시되는 별시장으로 향했다. 별시는 혜경궁 회갑을 맞이하여 인근고을 주민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한 배려였다. 

응시자격은 광주, 시흥, 과천, 화성의 유생으로서 유적(儒籍, 서원 유생명부) 과 교안(校案, 향교 학생명부)에 들어 있으면서 장적(호적)에 올라있는 사람에 한정했다. 그러나 수원 사람은 신도시이므로 오래 살지 않은 사람도 응시가 허용됐다.

이날 과거시험 문제는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 혜경궁께서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는 문구)’를 지으라는 내용이었다. 

무과는 수험생을 한명씩 불러 활을 쏘게 했다. 이들은 전날 초시를 치러 합격한 화성, 광주, 과천, 시흥사람 116명을 비롯, 구포사람 5명, 정조가 특별 응시를 허락한 화성부 교졸(校卒, 현역군인) 16명 등이었다.

낙남헌 방방도. 과거시험 합격자들을 격려하는 축하연 모습. 문과 5명, 무과 50명이 선발됐다. (자료=수원시) 
낙남헌 방방도. 과거시험 합격자들을 격려하는 축하연 모습. 문과 5명, 무과 50명이 선발됐다. (자료=수원시) 

이날 문과를 합격한 사람은 모두 5명으로 갑과 1인 생원 최지성(화성인 40세), 을과 1인 유학 임준상(광주인 29세), 병과 3인 유학 정순민(과천인 41세), 생원 이유하(시흥인 29세), 진사 유성의(화성인 33세) 등이었다. 

무과는 모두 56명을 선발했다. 갑과에는 친군위 김관(수원인 37세), 을과에는 부사과 김창운(광주인 34세) 등 5인, 병과에는 별무사 송덕관(수원인 51세) 등 50명이 선발됐다. 이들은 대체로 장용영에 속한 군병들로 합격률이 높아 이들의 사기진작에 도움을 준 것이다. 

문무과 합격자의 명단을 발표하는 방방의(放榜儀)는 정조가 친림한 가운데 합격증서인 ‘홍패, 사화(賜花), 사주(賜酒), 복두(幞頭, 과거합격자가 쓰는 관), 관대(冠帶) 등의 예물이 하사됐다. 갑과 합격자에게는 특별히 개(蓋, 우산처럼 생긴 깃발)를 주었다.

이날 마지막 행사로 봉수당에서 회갑잔치 예행연습이 진행됐다. 회갑잔치는 이번 행사의 주목적인 만큼 정조는 물론 혜경궁과 참여자 모두가 예행연습에 임했다. 정조의 걱정은 숙련된 기생을 선발하지 않고 바느질하는 침선비와 의녀는 물론 , 화성부의 여령(기생)은 생소했으므로 염려됐던 것이다. 연습이 끝난 뒤 혜경궁은 여령들에게 각종 옷감을 상으로 내렸다.

넷째 날  윤2월 12일(화성에서 둘째 날). 이날 첫 번째 행사로 현륭원 전배(展拜, 능참배)와 오후와 야간에 두 차례 군사훈련이 예정되었다.  

이날 새벽 정조는 군복을 입고 어머니를 모시고 현륭원을 향해 떠났다. 어가는 상류천점 앞길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정조는 어머니께 미음 다반을 드리고, 약방제조이자 병조판서 심환지에게 명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고르지 못한 것을 보아 편치 못한 것 같다. 원소(園所, 현륭원)에 가서 어머니가 드실 삼령차(蔘渶茶, 인삼차) 1첩을 다려놓고 대기하라”고 했다. 현륭원에 도착하여 어머니에게 삼령차를 드리자 심기가 고르지 못하여 드시지 못하자 잠시 두라고 명했다. 이어 혜경궁이 묘에 이르자 비통함이 넘쳐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28세에 뒤주에 갇혀 죽은 후 처음으로 대면하니 비통함이 어떠했을까. 정조가 심령차를 드렸으나 드시지 못했다. 정조는 “어머니께서 행궁을 나올 때 십분 자제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여기에 오시더니 비창한 마음이 저절로 폭발하신 것이다. 나 또한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하시겠느냐”고 했다. 홍살문 밖에 이르러 한동안 묘를 바라보다가 돌아갈 것을 명했다.

서장대 성조도. 이날 주간 군사훈련인 주조(晝操)와 야간 군사훈련인 야조가 실시됐다. 정조대왕이 서장대에 친림하여 진행됐다. (자료=수원시)
서장대 성조도. 이날 주간 군사훈련인 주조(晝操)와 야간 군사훈련인 야조가 실시됐다. 정조대왕이 서장대에 친림하여 진행됐다. (자료=수원시)

이날 군사훈련은 주간과 야간 두 차례가 예정되어 있었다. 

성(城)에서 하는 훈련을 성조(城操), 낮에 하는 훈련을 주조(晝操), 밤에 하는 훈련을 야조(夜操)라 한다. 정조가 말을 타고 서장대에 오르자 영의정 홍낙성이 정조께 아뢰었다. “신이 이곳을 지나간 것이 여러 차례이지만, 이와 같은 보장(保障, 보장지, 요새)의 땅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정조는 홍낙성의 말을 받았다. “원침을 지키는 일은 특히 중요하다. 비용을 헤아려 시작한 것인데 지리(地利)의 이로움을 얻지 못했다면 어찌 장대한 일이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겠는가, 나도 미쳐 몰랐다.”

이윽고 정조의 지시가 떨어지자 군사 훈련이 시작됐다. 북과 나팔과 명금(鳴金, 날짐승 소리를 내는 나팔)이 울리고, 함성과 포성이 하늘을 진동시키는 맹렬한 공격과 방어전이 전개됐다. 이날 참여한 병졸은 3700여명이었다. 

이날 밤에도 같은 장소에서 야간 훈련이 실시됐다. 야간 훈련에는 횃불이 사용되고, 성안 민가에도 문 위에 등을 하나씩 걸도록 했다. 

정조는 훈련이 끝난 뒤 장병들에게 궁시(弓矢, 활과 화살)와 포목 등을 상으로 주었다. 정조는 훈련을 통해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는 참 군주였다.

 

제60회 수원화성문화제가 수원화성 일원에서 ‘수원동락(水原同樂)'을 주제로 10월 7일부터 9일까지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해 정조임금의 뜻을 헤아려보길 적극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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