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환어행렬도. 행차의 일곱째 날인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한 행렬이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모습이다. 왼편 아래쪽엔 병사들의 삼엄한 모습이 보인다. 가운데 약간 위 부분에  푸른 휘장에 가려진 혜경궁의 가마가 보인다. 그림은 직사각형에 구불구불 배치해 입체감과 행렬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능행도 8폭중 단연 대표적인 화폭이다. (자료=수원시)
시흥환어행렬도. 행차의 일곱째 날인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한 행렬이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모습이다. 왼편 아래쪽엔 병사들의 삼엄한 모습이 보인다. 가운데 약간 위 부분에  푸른 휘장에 가려진 혜경궁의 가마가 보인다. 그림은 직사각형에 구불구불 배치해 입체감과 행렬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능행도 8폭중 단연 대표적인 화폭이다. (자료=수원시)

화성능행차 7일째를 맞았다. 

화성에서 4일간의 행사는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끝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이제 평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귀경하는 일이 남았다. 돌아가는 길은 내려올 때와 같지만 역순으로 진행됐다.

아침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화성행궁을 나오면서 정조가 명했다.

“광주, 시흥, 과천 등에서는 척후복병(斥候伏兵)이 여러 날 대기하고 있어 걱정이 된다. 어가가 지나간 뒤에는 차례로 척후복병을 철수시킬 것을 수어청과 총융청에 신전(信箭, 통신화살)으로 전하라.”

지지대 비각.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지지대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1800년(순조1)화성어사 신현이 비 건립을 주청해 1807년(순조7)완성했다. 비문은 호조판서 서영보가 지었고, 윤사국이 글을 썼다.  (사진=필자 김충영 )
지지대 비각.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지지대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1800년(순조1)화성어사 신현이 비 건립을 주청해 1807년(순조7)완성했다. 비문은 호조판서 서영보가 지었고, 윤사국이 글을 썼다.  (사진=필자 김충영 )

이어 행차가 미륵현(지지대고개)에 도착했다. 이곳에 이르자 현륭원이 보이지 않았다. 정조는 여기서 신하에게 명했다. “이 미륵고개에 오면 떠나기 싫어 거둥을 멈추고 한참 동안 남쪽을 바라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말에서 방황한다. 이번에 고개 위를 보니 둥글게 생긴 돌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지지(遲遲)’라고 이름 지으라. 그리고 앞으로는 미륵현 밑에 ‘지지대’라는 세 글자를 넣어 표석을 세우라.” 이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고개’로 불렀다.

점심 무렵에는 사근참행궁에 도착했다. 정조는 어머니보다 먼저 도착하여 광주부윤 서미수, 시흥현령 홍경후, 과천현감 김이유를 불러 읍폐(邑弊, 고을의 폐습이나 폐해)와 민막(民瘼, 백성이 고통스러움)을 물었다. 

혜경궁 가마가 도착하자 안으로 모셔 오선(午膳, 점심)을 올렸다. 점심을 마치자 행차가 다시 시작됐다. 안양교에 이르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어머니께 미음다반을 드렸다. 이어 시흥행궁에 도착했다. 정조는 먼저 도착하여 시설을 점검한 뒤에 안으로 모셔서 석선(夕膳, 저녁)을 올렸다. 음식의 종류는 화성으로 갈 때와 동일했다.

여덟째 날(윤2월16일), 아침 묘시(卯時, 오전5~7)에 시흥행궁에서 나오면서 말씀을 했다.

“지방관은 자기 경내의 부로(父老)와 민인(民人)들을 데리고 연로(輦路, 임금이 거둥하는 길)에 나와 대기하고 있으라.” 이는 백성들의 여론을 직접 듣고자 함이었다. 묘정삼각(卯正三刻, 6시 45분경) 시흥행궁을 떠났다. 

행렬이 문성동 앞길에 이르자 시흥현령 홍경후가 민인(民人)들을 데리고 길옆에서 어가를 맞이했다. 정조는 쉬면서 말했다. 

“보통 어가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반드시 시혜를 베푼다.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두 번째로 시흥행궁에서 밤을 보냈다. 모든 것이 만안(萬安)한 가운데 돌아오니 경행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백성들에게 인색할 것인가. 반드시 요역(徭役)을 경감해주고, 페막(弊瘼, 고치기 어려운 병폐)을 제거하고, 자은(慈恩, 어머니 은혜)을 널리 펴서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할 것이다. 너희들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하라.”

정조의 요구를 받아 민인들이 입을 열었다. 

“다행히 성스럽고 밝은 세상을 만나 입는 것, 먹는 것 하나하나가 임금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별다르게 천청(天聽, 임금의 귀)을 번거롭게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하자 정조는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정조는 다시 다그쳤다.

“그런 말은 외면인사이다. 너희들은 모두 나의 적자로서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함을 늘 안타까워하고 있다. 더욱이 구중(九重, 구중궁궐의 준말)의 깊은 곳에 있어서 부옥(蔀屋, 일반민간)의 질고(疾苦, 병고)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척의 가마 앞으로 그대들을 불러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여러 폐단을 직접 들어서, 여러 백성들이 행차를 바라보는 그 뜻에 보답하려한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는데도 무엇이 두려워서 말하지 않는가.”

행우승지 이익운이 정조의 말씀을 여러 백성들에게 두루 알리고, 들은 여론을 정조께 아뢰었다. 

“민인들은 실제 절실하게 고통스러운 폐막이 없습니다. 다만 호역(戶役, 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역)에 두 번이나 징발되어 폐단이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조는 비변사 당상 이시수에게 내 뜻을 민인들에게 널리 알리라고 했다.

“다른 때는 비상한 은택을 두루 펴기가 어렵겠지만, 금년에는 어찌 특별한 배려가 없겠는가. 지난해 가을의 환곡은 정퇴(停退, 연기) 한다고 이미 영을 내렸지만, 이를 모두 탕감할 것이다. 호역은 비변가가 방백(方伯, 관찰사)과 수령이 의논하여 폐단을 줄이고 일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게 할 것이다. 또 해마다 정월에 임금이 행차 할 때마다 민인이 연로의 눈을 치우고, 길 닦는 수고로움이 적지 않았다. 금년부터는 원행일자를 봄과 가을의 농극(농한기)으로 정했다. 이 또한 백성을 위한 고심에서 나왔다. 앞으로 행차가 지날 때마다 민정을 자세히 채집할 것이다. 폐단을 시정할 일이 있는지를 너희들은 잘 알고 있으라.”

백성들은 정조의 말을 듣고 모두 송축(頌祝)하면서 물러났다. 이때 한 사람이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정조는 이익운에게 명하여 그의 나이를 물었다. 그는 61세라고 했다. 정조가 말하기를, “비록 그 사람의 행동이 외람스럽고 예의가 없기는 하지만, 이미 나이를 물었으니 어찌 그냥 돌아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소원대로 몇 말의 쌀을 주라.”라고 했다.

문성동에서 휴식을 마치고 행차는 다시 길을 떠났다. 번대방평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한 정조는 어머니께 미음다반을 드렸다. 이어 만안현(萬安峴)을 거쳐 노량행궁에 도착했다. 정조는 어머니를 용양봉저정으로 모시고 점심을 올렸다. 

노량주교도섭도. 화성행차의 마지막날인 윤2월 16일, 노량의 주교를 건너는 행렬의 모습이다. 위쪽에는 남쪽 용양봉저정이 보이고 홍살문이 강 양안과 중간에 세워져 있다. 혜경궁의 가마가 중앙의 홍살문앞을 통과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행차 모습이 묘사돼 있다. (자료=수원시) 
노량주교도섭도. 화성행차의 마지막날인 윤2월 16일, 노량의 주교를 건너는 행렬의 모습이다. 위쪽에는 남쪽 용양봉저정이 보이고 홍살문이 강 양안과 중간에 세워져 있다. 혜경궁의 가마가 중앙의 홍살문앞을 통과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한 행차 모습이 묘사돼 있다. (자료=수원시) 

정조는 배다리를 관리하는 주교도청 이흥운을 불러 혜경궁이 하사한 금단 1필을 사급하고, 배다리를 건설한 사격(沙格, 뱃사공)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또 노량 별장에게도 찬탁(음식)을 하사했다. 

정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8일간의 행행으로 노동(수고로움)이 많았다. 어머니의 체도(體度, 몸의 풍채)가 일향(一向, 꾸준히)으로 강녕하시니 지금 돌아오면서 기쁨을 가눌 수 없다.”

정리사 심이지 등이 말했다. “초 10일의 비는 불과 반나절이었고, 14일의 비는 또 잔치 뒤였습니다.… 역시 하늘도 기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가 말씀하시기를, “원자(元子)는 내가 출궁한 날부터 매일 두 차례씩 편지를 보내 문안을 올리고 있다. … 하면서 원자의 편지 두 장을 보여주었다.” 앞글의 내용은 할머니의 회갑잔치와 양로연을 축하하는 말이고, 뒤의 것은 오늘 아바마마를 뵙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다는 뜻이다. 신하들이 읽어보고 축하를 올렸다. 이때 원자 나이가 6세였고, 5년 뒤 정조가 타계하자 왕위에 오른 순조(純祖)다.

정조는 한강 배다리 건설의 총책임자인 주교당상(舟橋堂上)서용보를 불러, “내일 다리를 철파하고 배들을 내려 보내 선인(船人, 뱃사공)들이 늦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배다리는 정조의 명대로 다음날, 즉 윤2월 17일에 해체됐다. 다리를 놓은지 23일 만이다.

8일간의 장엄한 화성행차가 막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천년에 한번 이룰까 말까하는 ‘천재일우지회(千載一遇之會)의 역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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