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속담이 시의 일종이라고 여겨왔다. 대개 말뜻에만 그치지 않고 각종 어조(語調)와 비유의 언어로서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촉진하고, 함축된 삶과 세속의 이치나 사리를 각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속담은 일종의 고전. 예를 들어 ‘등잔 밑이 어둡다’는 그 뜻이 사실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을수록 대상 사물의 전부나 본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잘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진실과 진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대상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객관 관찰을 하여야 겨우 그럴 수 있다는 각성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가끔 출현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천 년 전 중국의 다음 시 역시 그러하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가로 보면 산등성이 세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원근고저 따라 모습 제각각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네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이 내 몸이 여산 속에 있어서

                   - 「제서림벽(題西林壁)」/소식(蘇軾 : 1036-1101)

 

 여산은 중국 강서성 구강현에 있는 만학천봉(萬壑千峰)으로 유명하며, 중국문화사의 주요 인물들이 거처하였거나 상찬한 천하명산이다. 혜원(334-416)의 동림사(東林寺), 주돈이(1017-1073)의 염계서당(濂溪書堂), 주희(1130-1200)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이 있고, 도연명(365-427) 이백(701-762) 왕안석(1021-1086) 황정견(1045-1105) 육유(1125-1210) 등이 그 경치와 심회를 노래한 시가 4000여 편이나 된다. 

 화자의 토로는 ‘등잔 밑이 어둡다’처럼 평범하다. 좌우로 보면 옆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이고 위아래로 보면 솟은 봉우리들이기도 하며, 같은 산등성이 같은 봉우리라도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조망의 입지에 구애돼 달리 보인다. 나아가 산 속에 있어 시야와 각도가 제한돼 산 전체와 세부 경관을 알 수 없다는 탄식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이미 일곱 살에 “小山蔽大山(소산폐대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네, 遠近地不同(원근지부동) 멀고 가까워 그 지점이 같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비유이기도 한지는 알 수 없으나 산의 본래 모습이 바라보는 사람의 입지와 주관에 매여 달라지니 경계하여야 한다는 뜻이 내포된 건 분명하다. 하여간 두 시는 ‘등잔 밑이 어둡다’처럼 우리로 하여금 진리와 진실 추구와 실체 파악에서 맹인모상(盲人摸象) 난관을 상기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이 문제를 새카맣게 잊거나 상기하여도 귀찮아하고, 한두 번 경신을 시도하다가 쉽게 포기하며, 무엇보다 이해와 편의에 얽매여 슬그머니 외면한다. 여러 사정으로 혼란한 시국이기도 한 이 연말, 전체와 진실을 위하여 우리 한번 정좌하고 화두로 삼아보면 어떨까. 우리는 남이 나를 기만하면 존재 농락에 창피와 증오로 분노한다. 우리는 남을 기만하지도 말고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남으로부터 기만당하지도 말아야 하겠다. 또 나로부터도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겠다. 다음 시는 이상 맥락에 이어 읽어볼 시이다.   

 

산에 드니

산이 보이지 않았다

 

삶이여

자네도 혹 이럴 것인가

 

사랑 

그대 역시

 

품에 드는 날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인가

 

만유(萬有)가 내 안에 들어 천지(天地) 그윽하던 날

산 속에서 산이 걸어나왔다.

                               - 「적멸」/김우영

 

 산을 바라보면서 산에 걸어 들어온 화자, 그러다가 문득 보던 ‘산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고, 화두와 같은 근간의 문제의식에 관련된 각성을 한다. 아, ‘삶’과 ‘사랑’도 그 ‘품에 드는 날/자취를 감추고 말 것인가... 즉 화자는 어떤 사정으로 자신과 자신에 주어진 삶과 사랑을 아마 그 굴곡과 결핍을 반추하면서 ‘산’에 들어 오르다가, 문득 그런 각성을 한 것 같다. 즉 삶과 사랑을 ‘산’의 ‘만유(萬有)’처럼 이룬다면, 그 충족된 삶과 사랑, 글쎄 그렇다면 그것으로 다인가. 아니 그 풍요에 겨워 안주하면 그러면 오히려 마치 부재와 같이 그 의의가 무화(無化)되어버리지 않을까 의아해하는 듯하다. 곧 잠식되는 보름달의 역설. 그러니까 언제나 굴곡과 결핍을 용인하고 의식하여야 더 삶과 사랑을 지속할 수 있다는 각성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 날에 화자는 기꺼이 자족하며 ‘만유(萬有)가 내 안에 들어 천지(天地) 그윽하던 날’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굴곡과 결핍, 그 수용과 견인에서야말로 삶과 사랑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세상과도 화해할 수 있다는 뜻도 점철되어 있으리라. 그리고 다시 말해 이 각성에는 자신의 분수 인식도 포함되어 있다. 화자는 그래서 보게 된다. ‘산 속에서’ ‘걸어나’오는 ‘산’을. 

 이 시는 그러니까 ‘등잔 밑이 어둡다’ 계열이면서도 새 경지가 추가되어 있다. 지속과 변화의 한 사례. 기존처럼 등잔 불빛과 그 아래 어둠을 대조하면서도, 진일보한다. 즉 등잔의 밝은 불빛으로 그 아래 짙은 어둠 속을 조명한다. 외부의 진리와 진실 인식 문제와 온전한 자기성찰 맥락을 이어, 삶과 사랑, 그 곡절과 한계의 연속, 충족 불급(不及)의 견인을 성찰하게 한다.

           

 사족 : 이 시의 결말에도 여운이 있다. ‘산 속에서’ ‘걸어나’오는 ‘산’. ‘걸어나’오는 ‘산’은 득음하거나 득도한 수도자가 하산하는 모습과 같은 형상인데, 화자 자신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혹 자존이 과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연의 ‘삶이여 자네도’나 3연의 ‘사랑 그대 역시’에서 보듯, 과감한 그 의인화와 대구를 이루려는 형식 추구에 기인한 의물화로도 감안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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