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104세가 된 우리 사회의 어른 김형석 선생이 지난 해 12월에 새해 소망을 밝혔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나도 여러분과 같이 시를 쓰다가 가고 싶다”고. 《서울문학광장(문학의 집 서울)》의 초청으로 애송시를 낭독하고 나서 소감을 말하던 자리에서 피력한 이 의사는 최근 한 지상(紙上)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되었다. “오랫동안 나는 사회 속에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해왔다. 100세를 넘기면서 나 자신을 위해 아름다움을 찾아 예술을 남기는 여생을 갖고 싶었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그제야 알았다.” 

 사회의식과 진(眞)을 기초로 한 오랜 논고와 칼럼의 선 선양에 이어, 예술성 미(美)까지 추구하는 시작(詩作) 시도, 이 소식에만도 독자들이 행복할 것이다. 부연 중 ‘나 자신을 위해’라고 하였는데, 심미성 성찰과 표현으로 자신의 삶을 더 충실하게 고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고, 독자를 직접 대면하거나 직접 의식하는 논고나 칼럼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는 독자와 소통한다는 생각도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그제야 알았다’고도 하였는데, 겸사이면서도 시를 기리는 경의의 표시일 것이다. 이런 선생이 낭독한 애송시가 무슨 시인지 궁금하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1917-1945)의 이 「서시(序詩)」는 정지용이 쓴 서문을 지표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출간 이래 그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윤동주는 김형석 선생의 평양 숭실고보 동기이기도 하지만, 「서시」가, 삶의 진정성과 지향을 고아한 격조와 간결한 율조로 제시하는 시풍에서 거의 독보(獨步)이기에 선택하였을 것이다. 또 김형석 선생은 자신의 생애에서 교분을 나눈 첫 시인은 윤동주이고, 마지막 시인은 구상(1919-2004)인데, 별세를 앞두고 자신에게,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시작했는데 ‘죽음의 문 앞에 서니까 내가 그렇게 부끄러운 죄인이었다’라는 시를 보내왔다”고 하였다. 두 분의 교분도 심상치 않고, 성인 그리스도 폴을 사숙하며 평생 염결한 사표의 삶을 산 구상 선생 같은 분이 이 시를 자신의 생애를 비추는 한 거울로 삼았다니... 아니 그래서... 그런데 이 시의 메시지는 내력이 깊고 넓다. 일제 시기 만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의 정신과 기맥이 배경으로도 전경으로도. 한 수발하고 순수한 청년의 이상이 표백된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원하다. 

 1899년에 용감하게 만주 북간도로 월경하여 땅을 사들여 명동촌을 건설하고, 1918년 39인 무오독립선언에도 참여한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 : 1868-1942) 선생은 윤동주의 외조부. 명동촌은 나중에 한민족기독교공동체로 기독교의 교리가 그 기초이지만 1915년 이전에는 유학의 지향이 그 지반이었다. 공자의 신식병(信食兵)을 공동체의 원리로 삼았으며, 1901년에 서당 규암재를 세워 맹자의 의(義)를 강조하며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판 모세’ ‘간도의 대통령’으로 추앙되었던 김약연 선생은 본래 유학 경서에 통달한 유학자였던 것이다. 규암재의 후신이 명동학교이며, 이 학교에서 성장한 윤동주는 학교의 규암재 이래 전통과 무관할 수 없다.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물론, 유학의 세례도 제대로 받은 인격. 

 다 알다시피 「서시」의 첫 두 행,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란 소망은 맹자의 군자 삼락(三樂) 중, 두 번 째인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럽지 않다)”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다시 주목되는 것은 그 직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는 그 관련 토로와 태도이다. 아무래도 그 진정성에 놀랍다. 보통이라면, 떳떳한 삶과 호연지기를 이해하고 그 고상하고 정결한 기백을 부러워하면서 내면의 소양으로 삼는 데서 그치기 십상인데, ‘나는 괴로워했다’니. 그것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작고 단정한 푸른 나뭇잎 사이에 이는 그 바람, 어떤 바람인가. 간과하지 말고 그 바람을 피부로 상기하며 다시 이 시행들을 음미해보자. 이 고원한 용의는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봐도 부끄럽지 않다)’을 더욱 위로 추상(推上)하고 아래로 추하(推下)하며, 이 시 전체를 괄목상대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속기를 자각하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 구상 선생과는 아주 다른 취지에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사족 : 김형석 선생은 또, 항일운동 혐의로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 2월에 의문의 옥사로 별세한 친구를 그리워하면서, “동주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길을 걷지도 못하고 목숨을 빼앗겼다. ‘그리고’ 대신에 ’그래도’라고 했더라면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선생은 친구가 옥중에서 별세를 예감하며 또 그 직전에 자신의 이 시를 운명으로 상기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개연성 있다. 그렇다면 「서시」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자각하고 ‘걸어’간 윤동주의 「결시(結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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