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큼 어려운 학문은 없다’고 했다.

살아온 시간에 함축된 의미를 말로 다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중엔 연륜과 경험이 바탕이 된 지혜도 포함된다. 때문에 예부터 노마지지(老馬之智) 같은 노인 관련 고사성어와 속담은 넘쳐난다.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희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이듦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숙명이지만 잊고 사는 젋음이 많기 때문일 게다.

‘젊은 시절 노후란 먼일’이란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넌 늙어봤니? 난 젊어봤다’라는 화법도 그래서 나온 듯 하다. 젊음과 늙음 두 어휘는 반대 개념의 뜻이 아님에도 어느새 그렇게 됐다.

젊음이 늙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의 선순환이다. 또 인간 사회 진화의 연속적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은 넓어지고 사이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요즘 노인이 존경받고 우대받는 상황을 기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것도 이 때문 인듯 싶다. 똑똑한 손안의 기기들과 컴퓨터속 AI가 무한 기능을 발휘하는 덕분에 노인들의 지혜도 점점 빛을 잃고 있다.

물론 젊은이들 생각이라 동의 하지는 못하지만 현실이다. 그러니  노인들 경험이 오늘날 무슨 소용이며 무슨 지혜이겠는가? 어린이들의 비호감을 받는 이방인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노인 ‘위상’을 무너뜨리는 ‘폄하’는 없어야 한다. 폄하로 위상이 무너지면 사회질서가 파괴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그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걱정이다. 학교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화목과 인화가 그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이 미래에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여 우려도 크다. 그럴 경우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약자인 여성, 어린이가 먼저 위해를 받을 것이다.

지금 학교들이 무섭다고 선생님들이 말한다. 학교 선생님 교권도 어른 공경의 일환인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선생님이 무시되면 부모가 마찬가지로 무시되고 주변 어른들은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지식인들이 ‘변환’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노인 폄하에서 찾지 말고 젊음 의식의 전환에서 찾으라고 조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인구 중 가장 중간에 있던 사람의 나이(중위연령)는 45세다. 중위연령은 2000년 32세에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고령자 통계’를 보면, 2022년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전체 인구의 17.5%로, 앞으로 계속 증가해 2025년에는 20.6%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사회에서 초고령사회로 도달하는 기간이 오스트리아 53년, 영국 50년, 미국 15년, 일본 10년에 비해 한국은 7년에 불과하다.

이렇다보니 ‘신중년 세대’는 변화에 대비할 시간이 적었다. 거기에 젊은 세대와 갈등은 더 커졌다. 폄하도 늘고 있다.

경제계엔 ‘상품도 수명이 있다’ 라는 논리가 있다. 1965년 독일 경제학자  테오도르 레빗이 주장했으니 60년 가까이 됐다.

그는 ‘상품수명주기’를 제품이 개발된 후에 도입기, 성장기, 성숙기, 쇠퇴기 모델로 소개해 명성을 얻었다. 이후 경영학에서는 이 수명 주기를 따라 각 단계에 맞는 의사결정 및 전략 개발을 하고, 수명 주기를 관리하는데, 지금도 많은 기업들이 이를 적용시키며 소비전략을 짠다.

요즘 사람의 생애주기를 이같은 논리로 재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안타깝다. 정치권이 심하다. 툭하면 노인 폄하 발언이 나오고 있어서다.

과거부터 “60대 이상은 투표 안 해도 괜찮다. 집에서 쉬셔도 된다” “50대에 접어들면 멍청해지고, 60세가 넘으면 책임 있는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한다며 수명이 다한 상품 취급을 하기 다반사다.

이번엔 “왜 미래가 짧은 분들이 젊은이들과 똑같이 표결하느냐”“청년의 미래를 왜 노인에게 맡기나”“남은 수명(여명)에 비례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취지의 말이 세간의 화제다. 여론도 악화일로다. 노인이 무용하다니, 황당함을 넘어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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