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흔히 '돌봄도우미'라 부르지만 60년대엔 '식모'라 했다. 그리고 정겹고 짠한 이름으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어려운 시절 도시가정 살림의 동력으로, 농촌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당시 숫자가 얼마나 많았으면 서울의 두 집 중 한 집에 식모를 둘 정도였다고 한다. 저렴한 노동력 덕분이다.

1968년 기준으로 성인남성의 한 달 담배값이 1500원 정도였는데, 식모 월급이 이와 같았다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경향신문 1969년 10월 13일자 기사엔 이런 흥미로운 내용도 있다. "대도시의 가정에서는 식모를 두고 있었는데, 서울은 52.9%, 부산은 33%, 대구는 30%, 진주는 12%로 조사되었다"

경제 발전이 시작되면서 심화된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산물이지만 그만큼 애환도 많았다.

특히 식모의 상당수가 15~19세 사이의 어린 여성들이어서 더 그랬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고달픈 도시생활을 해야 했다.

이른 새벽, 식구들보다 가장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저녁 늦게 문단속까지 마친 뒤에야 잠자리에 들면서도 힘든 일을 도맡아 했던 '여린 손'들.

'한입'이라도 덜어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 생계를 책임진 이들 때문에 초근목피(草根木皮)의 고향 가족들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1960~1970년대 이들의 희생을 소재로한 문학과 영화도 양산됐다. '식모' '영자의 전성시대' '하녀' 등등.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이들은 산업 일꾼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여년후인 80년대엔 식모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가 될 정도의 직군(職群)이 됐다.

이름도 가정부로 변신했다. 이후 식모는 대부분 사라졌고, 그 빈자리는 돈 주고 고용하는 파출부, 가사도우미. 돌봄노동자들이 대신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물론 그동안 이들에 대한 근로조건과 인권의식도 많이 높아졌다. '노동' '휴무' '휴가' '상여금 및 퇴직금' 등 법적인 권리도 마련됐다.

그런가 하면 고용보험을 비롯한 4대 보험을 적용받게 되고, 근로기준법과 같은 노동관계법의 권익도 누릴 수 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대우도 마찬가지다. 한국 가사도우미의 시간당 임금이 홍콩이나 대만 등 인근 국가의 4배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다.

2022년 내국인 가사도우미의 시간당 임금은 1만1433원이다. 반면 싱가포르 외국인 가사도우미의 시간당 임금은 1721원이다. 무려 6배 차이가 난다.

2797원인 홍콩, 2472원인 대만의 외국인 가사도우미 시급과 비교해도 4배 이상 높다. 모두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다.

그러다 보니 최근 육아도우미의 경우 월 264만원을 줘야 쓸 수 있다. 이는 중산층 평균 수입 52%에 해당한다.

간병비의 경우는 더하다. 월평균 간병비가 370만원에 이른다. 이는 자녀 가구(40~50대) 중위 소득의 60%를 넘는 수준이다. '신(新) 영자의 전성시대'가 따로 없다.

그래서 ‘돌봄 재앙’ ‘돌봄 지옥’ ‘등골 브레이커'라 불리며 저출산 문제의 원인으로도 꼽는다.

최근 이를 해소하기 위한 고육책 (苦肉策)으로  외국인 가사도우미 도입이 심도있게 논의 되고 있는 모양이다. 만시지탄(晚時之歎)이지만 다행이다.

아울러 돌봄서비스업에 한해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대안도 제시되고 있다고 하니 하루빨리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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