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맺어진 학형이와의 만남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게 될 줄을 그때까지 나는 전연 몰랐습니다.

그때가 1971년 여름이었습니다. 장로회신학대학 2학년 학생이던 때였고 내 나이 30세 때였습니다. 학형이는 두 달이 지난 후에는 반듯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걸음 걷기를 배우는 어린이처럼 한 발 두 발 떼기 시작하더니 날로 좋아져 갔습니다.

그 소문이 마을에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형이에게 가려고 청계천 판자촌 골목길을 걷노라면 마을 노인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 양반 OO네 집 아들 곱추병 고친 양반이야. 우리 저 양반께 우리 동네에 예배당 세워주라 하세. 우리 손주들 예배당 댕기면 좋은 걸 배우지 않겠냐."

한 젊은 여인은 내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예배당 언제 세워지나요. 예배당 서면 우리 부부는 다니기로 했구먼요."

이런 말을 여러 번 듣게 되니 마음에 사명감이 떠올랐습니다.

"아하 ! 학형이를 통하여 이 마을에 교회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로구나."

이런 사명감이 마음에 떠오르자 학형이네 집을 오가며 마을 사정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청계천이 흐르다가 마장동 지나 한양대학 뒤편인 송정동 74번지에 1600세대 판잣집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 시절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경제 사정이 바닥이었습니다.

판자촌에는 끼니를 잇지 못하여 굶는 가정들이 있었고 아직 의료보험은 꿈도 꾸지 못하였던 시절이었던지라 병이 들어도 치료 받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나는 청계천 판자촌의 청계천 둑을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서울을 방문하신다면 어디로 오실까? 명동을 거쳐 세종로로 가실까? 돌로 잘 지어진 대형 교회로 가실까? 선남선녀들이 살고 있는 부자 동네로 가실까? 아닐 것이다. 청계천 둑길을 걸어 이 판자촌으로 오실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이곳에 교회를 세우고 이 마을 주민들과 열심히 살고 있으면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라 그 마을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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